나는 해방을 쓴다. 해방의 의미는 자연 자원을 비롯한 과학기술, 국가 기구와 같은 생산 수단의 소유 방식을 자본독점으로부터 노동자민중에 의한 민주적인 소유로 바뀌는 것이다. 그것이 해방의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해방이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금도 진행 중인 과정 중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해방의 충분조건만 아니라 필요조건들 역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독재에 의한 관념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은 해방의 충분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을 쓰는 것이 그와 같은 필요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실천 중의 하나일 것이다.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정희진)의 실현 여부는 국가권력과 정치 권력의 성격과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냐고 되묻자 권력의 성격과 의지는 어떻게 형성되는가는 물음이 날아든다. 자본과 권력의 대물림이라는 관행에 따른 것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관행은 지배적인 관념-이데올로기의 역사적 산물이다.
지배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 해방을 쓰는 것이기도 하다. 해방을 쓰려면 기존의 것에 대해 사유하고 의문을 품을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유와 물음으로부터 해방의 길이 열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이 안다고 말하는 사실들은 남을 ‘통해서’ 알게 된 것들이다. 그 ‘남’이라는 것이 ‘책’이나 ‘언론이나 영상매체’일 수도 있고 ‘사람들의 말’ 일 수도 있다. 우리는 남을 ‘통해야’ 무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누구를 통해서, 어떤 책이나 언론 매체를 통해서 안 것인지, 그 남이 ‘어떤 남’ 인지도 중요하다. 대개 ‘통한대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남’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 혼자 안다고 확신할 수 있을지언정 내가 아는 것이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조차 ‘남’을 ‘통해야’하는 것이다. 더구나 ‘잘’ 안다는 판단이 필요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것인지 판단해 줄 ‘잘’ 아는 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잘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의 양, 많이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잘 알기 위해서는 내가 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확인하는 ‘성실성’이 중요하다. 확인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잘’ 알게 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잘 안다는 것은 ‘확인 과정’을 여러 번 거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잘’ 안다는 것은 완전하고 완벽하게 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확인 과정’을 거치고 거쳐도 여전히 잘 모르는 부분은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잘 안다는 것도 확인 과정 중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중요해지는 것은 ‘확인 과정’이다. 확인하지 않는다면 잘 알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확인 과정에서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알고 있던 것에 있던 오류를 줄여나가게 된다. 그렇게 잘 ‘알아가는’ 것이다.
‘잘’ 안다는 것은 대상이나 사태의 본질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많이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대상이나 사태를 이루는 현상만 많이 알고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잘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 중요해서 본질적이지만 감추어지거나 가려지기 때문에 더 중요하지만 잘 알기 어려운 것이 본질이기도 하다.
그런 본질을 알려고 노력하고 알아내야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말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도 그런 본질적인 측면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사실인데 잘못 알고 있다가 ‘확인 과정’ 없이 믿거나 함부로 말하거나 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본질을 가리거나 은폐하는 것은 지배 세력이 자신들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데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본질은, 더 중요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ㅣ참하다
‘참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습니다.
1.(생김새 따위가) 말끔하고 곱다.
2.(사람이나 그 성품이) 차분하고 얌전하다.
‘참하다’는 말이 사용된 예로 들고 있는 사전적 문장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어머니는 이번 추석에는 참한 색싯감을 데리고 오라고 성화시다.
숙희는 참하게 차려입고 외출을 했다.
참하게 생긴 희철이의 누이가 자꾸만 생각난다.
사전이 예로 든 문장에서 ‘참하다’는 말이 여성들(숙희, 누이, 색싯감)에게 쓰이고 있지만, 1번에서 ‘생김새’에 ‘여성’을 특정하지 않았다는 점, 2번에서 ‘사람’이라고 쓰고 있다는 점, 실제로 일상에서도 ‘참한 신랑감’, ‘그 사람 일을 참하게 한다’와 같은 표현들도 쓴다는 점에서 ‘참하다’는 표현이 ‘여성’에게만 쓰이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말끔하고 곱다’는 어떤 ‘생김새’인지, ‘차분하고 얌전하다’는 어떤 ‘성품’인지, 그 의미를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듭니다. 물론, 사람들이 ‘참하다’고 말할 때, 떠올려지는 ‘생김새나 성품’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떠올려지는 ‘참한’ ‘생김새나 성품’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며 그들만의 ‘참하다’ 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생김새가 말끔하고 곱거나 성품이 차분하고 얌전하다’는 ‘참하다’는 말의 뜻을 사전이 정하고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사회적 의미는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보편타당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언어’가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오히려, 모든 ‘언어’는 특정한 사람들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가집니다. ‘글과 말과 몸짓’이라는 언어가 항상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항상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언어’도 ‘중립적이거나, 보편타당하거나, 절대적이거나’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언어든 ‘중립, 보편타당, 절대’의 이름으로 마치 그런 것처럼 특정한 사람들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회적 통념’과 같은 관념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어떤 ‘언어’의 ‘객관적’ 의미를 찾아 형성해 나가는 과정은 중요합니다. 그 과정은 언어의 객관적 의미를 묻는 일일 것이며, 그 과정에 따라 그 의미는 가변적일 수 있습니다.
특히, 옳고 그름, 선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과 같이 가치판단이 따를 수밖에 없는 언어 사용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옳은 것이, 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 그 누군가에게는 그른 것, 악한 것, 추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와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참하다’고 규정되는 기준인 ‘말끔하고 고운’ 생김새, ‘차분하고 얌전한’ 성품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그 기준 역시 절대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참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말일까요? 당신은 참한 사람인가요? 참한 사람이 아닌가요? 어떤 기준에서 그런가요? 당신에게 ‘참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만일, ‘참하다’는 말이 ‘생김새, 성품, 결혼 상대자’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면, ‘참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면, ‘참하다’는 것의 기준은 누구의 것인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저의 기준에서는 생김새나 성품으로 인해 참해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평등한 세상’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참해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이유에서 참한 세상이야말로 평등한 세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참하게 태어났으니까요.
ㅣ착각하지 마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역사는 동물보다 얼마나 더 나은 것일까. 동물보다, 다른 인간보다 우월해지려는 욕망은 전쟁을 일으키고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을 짐승처럼 부리다 팔거나 내다 버리는 노예제 하나 없애지 못하면서 인간이 동물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작 지능적으로 인간을 지배할 줄 아는 능력을 개발시킨 것이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일까. 그런 지능개발이 동물적 본능보다 뛰어나다는 근거는 무엇일까. 누가 인간에게 인간의 노예화라는 야만을 허락한 것일까.
신의 이름을 빌릴 수 있을지언정 부처가 예수가 그런 짓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성보다는 본능에 더 가까워 보이는 동물의 세계. 그 동물적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인간은 야만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인가.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동물학자인 파월박사는 원숭이를 지키기 위해 인간을 살해하는 정신이상의 살인자로 감옥에 수감된다. 하지만 파월박사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을 가두는 감옥의 규율과 통제를 비웃으며 죄수들과 자신의 정신이상을 치료하겠다던 콜터 박사의 지지를 받으며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런데 규율과 통제가 지배하는 사회의 일부인 감옥으로 부터 벗어난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아니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착각은 자유’라는 말은 착각해서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 사태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오히려 그 사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경고하는 말일 것이다. 파월박사는 콜터 박사에게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타인을 사회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타인으로부터 사회로부터 통제당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 사회에 태어나고 자라면서 그 사회의 규율을 따르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다. 하지만 한 사회의 정해진 규율이라는 것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규율은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약속으로서 그 규율을 잘 지키느냐 마느냐를 떠나 규율 자체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 그 규율이 인간들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고 유용한 장치가 아니라 권력의 이름으로 인간들을 가두고 통제하는 것이라면 그 규율의 내용을 문제 삼아 규율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파월 박사의 말대로 그 규율이 인간을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통제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규율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이 그 규율을 바꾸어 나가는 만큼이다. 그런 점에서 감옥을 비웃으며 감옥을 벗어나 파월박사가 향한 곳이 어디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감옥과 같은 사회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착각일 것이기 때문이다.
파월 박사가 감옥과 같은 사회를 벗어나 사라진 곳은 자연일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인간들의 삶의 기반인 자연을 돌아보고 돌보는 일은 소중한 일이다. 흙과 대지, 물과 바람, 그 속에서 함께 살아 숨 쉬는 동식물의 세계,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할 수 있으려면 자연의 일부로 그들 자연을 돌보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파월박사의 행위는 자연으로부터 태어난 인간의 본능적 발현이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규율 속에서 그는 범죄자이며 탈옥수이다. 파월박사가 자신의 범죄가 정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고 사회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감옥 같은 사회로부터 함께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공간은 대부분 감옥과 원시림이다. 감옥에서 원시림으로 원시림에서 감옥으로 두 공간의 자연스러운 화면이동은 통제로부터 자유로, 자유로부터 통제를 느끼게 해 준다. 또한 감옥과 원시림이 별개의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감옥도 원시림도 사회의 일부이지 사회의 바깥일 수 없다. 그것은 언제든지 원시림의 자유로움이 감옥과 같은 통제의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들의 사회가 그와 같은 통제와 자유라는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고정될 수는 없다. 영화 속에서 그 둘을 대신해 줄 덜 통제된 좀 더 자유로운 다른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두 공간의 간극을 좁혀 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인간들은 존재한다. 콜터 박사와 죄수들이다.
정신병적 범죄로 수감된 비 정상인들이 서로를 돕는 행위는 인간의 본능과 멀지 않다. 오히려 비 정상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간수들의 지나친 행동들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콜터 박사가 감옥의 규율을 바꾸려 할 때 죄수들과 간수들의 대비되는 태도는 간수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규율이 틀린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성은 스스로 만든 규율을 문제 삼지 않을 때 오히려 그 규율 속에 갇히게 된다. 스스로 만든 논리에, 규율에 갇히는 것이야말로 인간들이 자신을 가두는 감옥일 수 있는 것이다. 즉, 한 사회가 감옥과 같다 하더라도 그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그 사회를 문제 삼고 그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사회에 대해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는 다른 사회로의 변화 가능성에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성적 판단이 전부일 수는 없다. 내가 옳다고 알고 있던 것이 틀린 것일 수도 있고 인간들의 이성만이 아니라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행위들에 의해 사회는 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위험에 처한 파월 박사를 지키려다 죽어간 고릴라의 눈빛은 현대인들에게 경고를 하는 듯하다.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그런데 착각이라는 말을 상상, 꿈 등으로 바꿔 불러도 좋다면 가끔은 착각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통제하고 누군가로부터 통제당할 수 있다는 착각이 아니라 누군가를 통제하려들지 않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세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으로서의 상상이나 꿈은 필요한 것이다. 물론 파월박사의 말처럼 자유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영화 <인스팅트 Instinct>)
2026.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