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정희진)이 ‘당장 가능한 가장 가까이 느껴지는 해방 세상’이라고 하니 날아드는 반응들이 꽤 반갑다. 대부분 기득권 논리, 냉소주의, 패배주의에 따른 회의적인 것들이다. 그 ‘해방 세상’ 또한 하나의 관념일 뿐이다. 그 관념의 강도와 설득력은 얼마나 현실에 근거해 있는가에 달려 있겠다.
그에 대한 반응이 무엇이든 반갑기도 하지만 수동적으로 반응만 하기보다 자신이 바라는 해방 세상을 연구하고 이야기하고 글로 창작해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즐겁기도 하고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해방적인 관념을 창착하는 것이 해방 세상으로 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니 말이다. 해서, 당신의 해방 세상 창작을 예찬한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모든 인간은 예술가
우리들은 이미 누구나 예술가이며,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 근거는 뛰어난 두뇌와 오감, 손, 발이라는 훌륭한 창작 수단을 지닌 우리의 몸, 그리고 그 훌륭한 수단을 이용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광대한 자연을 대상으로 행하는 노동이다. 우리는 주어진 자연환경을 이용해서 집도 짓고 음식도 만들고 옷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고 작곡도 하고 소설도 쓰고 영화도 만든다.
즉, 어떤 대상물에 나의 노동을 가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예술 활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예술 활동이며, 그 때문에, 그 결과물들에 대해서도 멋지다, 아름답다, 추하다 등등의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술 활동을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도 그 활동의 결과에 따라 멋지다, 훌륭하다, 추하다 등등의 평가가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면서 동시에 자기가 의도한 대로 노동의 산물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 활동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다른 특별한 행위라는 생각을 조금만 바꾼다면, 예술 활동을 위해 굳이 시간을 따로 내거나, 경제적인 비용을 따로 지불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매일같이 자신의 능력을 실현하는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일과 후에도 자신의 예술적인 능력을 뽐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예술 활동이 만들어낸 예술품들을 안주 삼아, 더 나은 예술 활동과 예술품을 위해 찻잔 혹은 술잔을 기울이며, 그 어떤 철학자들이나 예술가들 못지않은 현실적인 고민들을 나누며, 그 어떤 정치인들 못지않은 훌륭한 정치적인 발언들을 하며, 그 어떤 영화감독 못지않은 영화에 대한 멋진 생각들을 쏟아내기도하고, 그 어떤 소설가 못지않은 상상력으로 서로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하고, 그 어떤 가수들 못지않은 노래실력을 뽐내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는데 시간과 경제적인 비용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술품들의 수동적인 감상자로서만 아니라, 예술가로서 우리의 태도를 조금만 능동적으로 바꾼다면, 살면서 겪는 고통들을 멋진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예술 활동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영화든, 음악이든, 미술이든, 소설이든, 그 결과물의 질에 관계없이, 그 예술 활동 자체만으로도 또한 예술가로서의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통을 넘어 행복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고통을 여러 예술 매체를 통해 승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행복한 예술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될 수 있음'에 대한 근거는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지금껏,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 온 것처럼 말이다.
ㅣ연구자 예찬
<작가 예찬>이라는 글에서 썼듯이 나는 작가를, 작가 되기를 예찬한다. 예술 창작 행위로써 시, 소설, 수필, 시나리오, 대본을 쓰는 작가도 있고 자기 치유나 비평을 위해서 글을 쓰는 작가도 있다.
나는 주로 성찰하는 글을 쓴다. 나는 ‘글과 함께 삶을 짓는’,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쓰는’ 생활 작가다. 그렇지만 내 글이 시나 소설에서부터 자기 치유나 비평의 성격을 띄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그 모두를 포괄하는 형식의 글을 의식적으로 써 보기도 한다. 나는 작가만 아니라 연구자를, 연구자 되기를 예찬한다. 온갖 이름의 연구소가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전 국민 1인 1악기 배우기처럼 전 국민 1인 1연구소 만들기를 소망한다. 굳이 연구소가 없더라도 연구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무엇보다, 자기 연구자, 자신에 대한 연구자가 되기를 예찬한다. 자기 연구는 자기를 존재하게 하는 이웃, 사회, 역사에 대한 연구일 수밖에 없다는, 자기 연구가 자기만의 연구에 머물 수 없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점에서 자기 연구자가 되기를 예찬한다.
‘연구硏究’가 ‘어떤 일이나 대상을 깊이 있게 조사하고 생각하여 이치나 진리를 밝힘’이라고 한다면 이미 작가는 연구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글을 쓰려면 연구하게 되는 것이고 연구의 결과를 글로 쓰게 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작가와 연구자를, 작가 되기, 연구자 되기를 예찬한다. 자신의 삶을 위하여,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삶을 위하여 누구나 작가, 연구자 되기를 소망하며 예찬한다.
ㅣ스스로 빛을 내는
예술. 보거나 듣는 것 만으로도 늘 설레는 언어다. 그와 동시에 문득 문득 나 스스로 묻고 답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문학’도 ‘예술’도 ‘사랑’도 나에게는 그런 언어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다’ 이런 말을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한 것이 꽤 오래된 것 같은데, 누가 문학이, 예술이,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스스로 묻고 답해 가지고 있던 그 답이 이내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이라는 글에서 대중문화를 ‘허접 쓰레기’라고 신랄하게 혹은 과도하게 비판하지만, 아도르노 이후 오늘날 대중문화가 ‘산업’으로 더 각광 받고 있지만, 그럴수록 아도르노의 비판은 더 빛을 발하는 것만 같다.
상품성이 높은, 잘 팔리는 예술이라면 그럴만한 ‘예술성’을 지닌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예술은 아도르노의 비판처럼 ‘사이비 개성’도 아닐 것이며, 나치나 자본과 같은 권력이 강요하는 동일성 원리에 굴하지 않은/않을 예술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대중들이 사랑하는 ‘문학과 예술’이라면 한낱 상품에 불과한 예술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자체가 ’빛‘인 예술, 한낱 상품이 되기를 강요하는 ’자본권력‘을 예술의 이름으로 넘어선 예술이 아닌가. 그러한 예술이 가능한 것에 아도르노의 비판적 시각이 한몫 했을 수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예술은 그럴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그런 빛의 예술이 가능하다고 해야겠다.
해서,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예술이라는 답을 하면서, ’예술, 스스로, 빛‘과 같은 언어에 설레면서 또 묻는다. 그래서 문학이, 예술이, 사랑이 뭔데?
2026.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