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당장 가능한 가장 가까이 느껴지는 해방 세상이라고 밝힌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정희진)에 대해 이곳저곳에서 물음과 의견이 날아들었다.
그들을 종합해 볼 때 정희진이 주장하는 해방 세상의 실현 여부는 ‘자본독재권력들과 결탁한 국가권력, 정치 권력, 언론 미디어 권력, 지식 권력, 노동 권력’의 성격과 의지, 그리고 ‘또 다른 나’인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아동, 노인, 노숙인, 비서울거주인, 사회적 약자 모두’의 단결에 달려 있다는 결론이다.
경제력은 충분해 보이고 결국 그들 주체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늘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나는 그와 같은 해방 세상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동참할 의지가 있다. 또 다른 당장 가능한 해방 세상 창작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때를 기다리며 또한 만들며 나의 해방을 쓰고 있어야 하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시간적 핵
인식 자체가 역사적이며 ‘시간적 핵’(Zeitkern)이다. 시간적 핵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타이밍(timing)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는 영원한 것이야. 그렇기 때문에 사태가 바뀌더라도 상관없이 이건 타당한 거야. 이런 것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매 상황에 맞는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는 사고에서 ‘진리는 타이밍’이라는 얘기를 할 만하다. 그러니까 어떤 고정불변의 진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기본이다.
늘 관건은 그 ‘때’가 언제이며, ‘매 상황’이 어떠하냐는 것이겠다. ‘인식 자체가 역사적이며 시간적 핵’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매 상황을 따라잡는 인식을 계속하고 있어야 시간적 핵으로서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복잡하고 가변적인 현실 속에서 인식이 그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역사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매번 늦거나 빠르거나 한 것이다. 그럼에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듯이 늦게라도 놓친 타이밍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도 다시 현실을 따라잡을 가능성의 일부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 시간적 핵, 타이밍이라는 그 때가 본디 있는 것인지, 인식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있던 것이 지금 형성되고 있는지 그 모든 측면이 존재하는 것인지 물을 수도 있다. 아도르노의 주장에서 분명해 보이는 것은 사태를 촘촘히 따라잡고 있어야 있던 것이든 형성된 것이든 형성하는 것이든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일 것이다.
ㅣ구분하되 분리하지 않는
여러 삶의 원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구분하되 분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구분은 하되 분리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와 너는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 구분해야 하겠지만 나와 너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분리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나와 너를 구분한다는 것은 둘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 나와 너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평등의 의미이기도 하다. 다른 우리가 각자 다른 그대로 인정하고 받는 것이 평등이지 차이를 없애고 균등하게 획일화하는 것은 차별이자 불평등이라고 해야겠다.
다른 하나는 나와 너는 다르지만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연관’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너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한다는 점에서 둘의 ‘관계성’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무관한 듯 분리하게 될 때 그 둘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와 너만 아니라 감성과 이성, 의지와 본능, 의식과 존재, 현재와 과거와 미래, 이상과 일상, 주변과 중심, 여성과 남성, 노동자와 자본가, 기계와 인간 등등. 세상의 만물을 구분하되 분리하지 않아야 할 듯싶다. 만물은 그 자체로 고유하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해 가는 매개된 존재인 것이다.
ㅣ모순의 바다 건너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에서는 촘촘한 미시론적 사고를 강조한다. 한데, 아도르노는 데카르트식의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고를 ‘계단의 우상’이라고 비판하며 때로는 ‘날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순된 것처럼 들리는 아도르노의 주장은 현실이 모순적이라는 한 예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현실과 사유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과 사유의 동일성을 전제하는 ‘개념적’ 사유는 늘 모순된다.
‘모순’이라는 표현 대신 ‘어긋난다’거나 ‘미끄러진다’거나 ‘공백’이나 ‘틈’이 늘 있을 수밖에 없다와 같은 표현을 쓰더라도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모순을 포함한 그들 표현이 ‘일치’나 ‘조화’보다는 ‘대립’이나 ‘갈등’, 더 나아가 모순에 이를 가능성이 더 커 보이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개념적 사유와 그에 대한 반성적 사유도 동일할 수 없음에도 동일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현실과 사유, 사유와 사유의 모순이라는 이중적인 모순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아도르노의 사유 전략이 촘촘한 미시론적 사유인 셈이다.
그처럼 아도르노가 ‘모순들’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모순적인 ‘현실 자체’에 대한 인식에 충실하다는 사실이야말로 ‘모순의 바다’를 건너 ‘서로 다른 것들이 사랑하며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는 길이겠기에 중요해 보인다.
2026.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