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당장 가능한 가장 가까이 느껴지는 해방 세상이라고 밝힌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정희진)은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미래를 과학자들이 주장한 것이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철학자, 경제학자를 비롯해 정희진 같은 여성학자, 평화학자들도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겠다.
오래 전에 주장되어 지금도 주장되고 있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인 셈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굳이 인간이 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을 로봇이 대신한다면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으로서 자아실현을 하거나 인간과 자연을 돌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창작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인류를 바라면서도 아직은 오지 않은, 오지 않을 미래라고 여기는 중심에는 생산수단과 과학기술을 독점하고 있는 자본 권력, 국가권력, 정치 권력의 기득권 논리와 그들 권력을 바꾸어낼 수 없다는 냉소주의나 패배주의가 있다. 정희진이 주장하는 오래된 미래를 위해서는 기득권 논리, 냉소주의, 패배주의를 넘어서야 하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민주주의는 민주화
민주주의는 부단히 민주화해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입장이기도 하다. ‘완전하거나 완벽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지금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로 부단히 민주화해 갈 수는 있을 것이다.
모든 민民이 주인主이 될 때까지 反인권, 차별, 불평등을 줄이고 해소해 나가는 것이 민주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류는 더 나은 정책을 모색하고 법과 제도로 보완해 나가고 있 것는이다.
민民이 선출한 위정자들이 민주화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할 경우 책임을 묻기도 한다. 하나, ‘소환’과 같은 제도가 제대로 시행된 경우는 많지 않다. 위정자들이 자신들에게 책임을 묻는 제도를 만드는 데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이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데 큰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위정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 이전의 ‘공동체’로 돌아가더라도 모든 ‘民’이 ‘직접’ 정치를 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공동체와 법제도의 규율이 인간들의 세상에서 불가피하다고 한다면, 민주화를 위한 ‘정치’가 중요하다면, 그 정치의 형태가 ‘간접이냐 직접이냐’는 구분보다 간접이든 직접이든 민주화를 위한 의지와 정책이나 법제도를 얼마나 현실화할 수 있는지가 중할 것이다.
反인권, 차별, 불평등에 대한 입장 차이에 따라 각자의 권리를 위한 정치가 권력을 위한 전쟁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민주화를 우선할 수 있는 것도 간접이든 직접이든 모든 ‘民’이 ‘主’가 되어가는 민주의 민주화 정도에 달려 있을 것이다.
ㅣ국가는 성공할 수 있는가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의 책 제목이기도 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보다 나에게 더 관심이 있는 물음은 ’국가는 성공할 수 있는가‘, ’실패와 성공의 의미는 무엇인가‘, ’국가와는 다른 대안은 있는가‘와 같은 것이다.
국가의 기원이 소수 권력자들의 부와 권력을 사유화私有化하는 데 있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에서 국가가 아닌 국가 이전의 무정부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국가의 탄생 자체가 이미 국가의 실패라고 불러야 한다는 점에서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국가 탄생 이전의 공동체들에서는 국가권력이 야기하는 폭력이나 불평등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수 권력자들을 위한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국가라는 권력도, 국가의 폭력도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에게 국가와 다른 대안이 있는가. 국가 이전의 공동체로 회귀하는 것이 국가를 대신할 수 있는가. ‘사회주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국가들이 존재했고 존재하지만, 국가와는 달라 보이는 공동체들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소수 권력자들의 부와 권력의 사유화라는 국가의 문제를 넘어섰는지는 의문이다.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 자본의 세계화(신자유주의)와 자본독재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는 가능할까. 인간의 세계도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생성과 소멸, 흥과 쇠와 같은 자연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고정불변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는 자연의 법칙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부와 권력을 사유화하여 인간을 학살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만행도 영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러한 만행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려는 인간들의 의지도 자연의 일부인 인간 세계의 법칙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ㅣ우애와 평등을 위한 물음
노예제든, 봉건제든, 자본제든 어느 생산양식에서든 생산력을 증대시키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생산력을 어떤 방식으로 증대시키는가일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인류사의 생산양식에서처럼 생산수단을 사유화 한 소수가 자연과 인간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방식으로만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러한 생산양식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수탈과 착취’를 통한 생산양식이었기에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필연적인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든 가설이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과 착취’라는 이유에서 다른 생산양식에 대해 의문을 가질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생산양식도 가능하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실제로 인류사에 ‘생산수단의 사유화 없는’, ‘수탈과 착취 없는’ 생산양식의 형태를 지닌 공동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역사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과 착취’에 기반한 ‘생산양식’보다는 ‘우애와 평등’에 기반한 생산양식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과 착취’에 의하지 않고도 생산력을 증대시켜 소수만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가 함께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에 의해 그러한 생산양식의 가능성은 생겨나는 것일 테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러한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러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힘의 논리에 따라 힘 센 소수가 자연과 인간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것이 인간이 포함된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한 생태계의 법칙이 전부가 아니라 생태계의 만물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물질대사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우애와 평등’에 기반한 생산양식을 바라며 지향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고 점점 더 늘어갈수록 그러한 생산양식의 확대 가능성이 커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러한 생산양식이 확대되기 위한 관건은 한 가지 사실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과 착취 없이, 혹은 수탈과 착취를 최소화하면서도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이미 물음 속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물음과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온 것이, 찾아가는 것이 인류가 ‘우애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과학과 이성’의 도움으로 진보해 온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2026.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