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12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나의 해방을 위해서 너의 해방 우리의 해방이 필요하다. 나의 해방은 나만의 해방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너의 해방, 우리의 해방 없이 나의 해방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해방은 우리의 해방이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가까운 이웃에서부터 먼 나라의 너희까지 모두 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국의 자본 권력, 국가권력, 정치 권력의 성격을 민주적으로 바꾸어내는 것이 나의 해방, 우리의 해방이기도 하다. 자연자원 수탈과 노동력 착취와 전쟁을 통한 자본의 무한 이윤 증식이라는 제국적 생활방식을 바꾸어내기 위해서도 나와 우리의 일상을 민주적으로 민주화하는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아직 희망은 있다


‘신新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세계화’를 통해 20세기를 지배한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국제 관계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여러 강국’인 ‘열강列强’들일 뿐이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소련이나 중국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을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인 ‘우방友邦’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국가 권력의 중심에 있던 정부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이나 재벌들이나 지식인들어야 한다. 저들 열강들에 기생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겨온 자들이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극단적 이익의 시대’에 ‘더 이상 우방은 없다’는 천명은 미국과 서유럽의 열강들이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몰락하고 있다는 고백일 뿐이다. 그동안 우방인 척 이라도 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겼지만 이젠 살아 남기위해 노골적으로 이익 챙기기에 바빠진 것이다.

무한 이윤 증식을 위해 자연 및 인간 자원을 수탈하고 착취해 온 제국적 자본주의의 현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몰락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멈출 수 없는 자본주의의 숙명이기도 할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 열강들의 자리를 중국을 비롯한 또 다른 누가 차지하더라도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무한 이윤 증식을 위한 무분별한 자연 및 인간 자원 수탈과 착취를 어디까지 얼마나 분별있게 관리하며 약소국과 약자들을 돌볼 수 있느냐에 따라 몰락의 시간을 조금은 늦출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이 인류의 미래이며 희망일 것이다. 아직 인류에게 희망은 있다.



ㅣ전쟁을 위하여


영화 <풀 메탈 재킷>은 군대라는 국가 장치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전사(戰士)로 사육되는지 군대의 폭력성을 통해 보여준다. 군대에서 신병들은 똑같은 헤어스타일과 패션으로 획일화된다.(물론 그 속에도 ‘사이비개성’은 존재한다)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지 않으며 ‘카우보이’나 ‘조커’등의 별명으로 불린다.(신병들은 번호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개인의 고유성은 말살된다.

무엇보다 군대에서 신병들은 자신이 달성해야 할 유일한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만(적을 죽이는 일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단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목적을 수행하는 기계적인 존재로 변해갈 뿐이다. 교관 하트만은 흑인(nigger), 베트남인(gooks), 이탈리아 이민자(wops)등을 인간 이하의 존재임을 주입시킨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미해병의 적이기 때문이다. 적인 이유는 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병들의 ‘여성성’을 제거함으로써 여성 또한 해병대의 적으로 만든다. 여성성은 적을 무찌르기에 나약한 성질이기 때문이다. 하트만의 훈련성과는 신병인 파일을 통해서 바로 확인된다. 적응하는 게 이상해 보이는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는 고문관이라고 불린다. 그런 고문관은 동료들이 동료애를 발휘하여 챙겨주면 될 것인데 오히려 놀림감이 된다.

결국 파일은 동료들과 하트만의 가학과 따돌림을 견디지 못하고 하트만에게 훈련받은 전투력으로 하트만을 죽여 버린다. 개인의 고유한 의식과 도덕적 감각을 마비시킴으로써 적을 살해하는 살인자를 길러내는 것이 군대의 목적이라면 하트만은 목적에 실패한 것이다. 적이 아니라 자신을 살해했으니 말이다. 그것이 군대가 안고 있는 모순일 것이다. 즉, 자신의 행위 목적에 대해 반성할 수 없는, 반성해서는 안 되는 맹목성이 하트만과 파일 모두를 파멸로 몰아간 것이다. 군대가 그런 파멸의 연습장이라면 전쟁터는 파멸의 실전장일뿐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베트남인들을 돕는 것은 모든 베트남인들이 마음속으로는 미국인이기 때문이다.”라는 <풀 메탈 재킷>의 미군 대령의 말에서 그들에게 내면화된 미국우월주의와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관념을 읽을 수 있다. 미국우월주의와 백인우월주의라는 이름으로 타자를 지배하려는 침략과 약탈의 제국주의적 행태는 국가와 기업과 군대를 통해서 일상적으로 훈육되는 것이다.

그들은 타자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존중함으로써 공존의 관계를 만들어 가기보다 타자를 지배하려고만 드는 태도를 훈육당함으로써 식민주의라는 야만적인 폭력을 일상화하는 데 기여한다. 그런 점에서 전쟁의 대리인들인 미국군인들 역시 희생자라고 말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는 그런 식민주의 이데올로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미국은 패배했다.

도대체 왜 그러해야 하는지 알려고 할 필요도 없이 국가의 명령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내면화된 식민주의의 민낯인 것이다. 베트남인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자신들을 침략한 미국이라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목숨을 건 싸움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그 행위 자체가 부당할 수밖에 없는 침략자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에 무슨 이념이 필요할 것인가.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배는, 베트남인들의 미국에 대한 승리는, 미군 대령의 베트남인들에 대한 내면화된 이데올로기가 허상이었음이 드러난 결과이기도 하다. 원주민들의 자기 보존이라는 본능 혹은 이념이 침략과 약탈이라는 본능 혹은 이념을 이긴 것이다. 전쟁에 침략과 약탈 말고 무슨 정당한 이유가 있을까. 야만적인 전쟁이 계속되는 한 누구도 승자일 수 없으며 모두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ㅣ쿠바 여행


쿠바에는 두 차례 방문했다. 2013년에 열흘(4.10~4.19) 동안 ‘아바나’에만 머물렀다. 2012년 11월 12일 시작된 6개월의 중남미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였던 멕시코시티로 가는 여정에 쿠바도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중남미 여행의 여행길에 잠시 들른 것이었다는 뜻이다. 2017년의 방문(7.8~8.3)은 25일이라는 기간이 말해주듯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쿠바와 관련한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면서 여느 자본주의 국가와는 다르게 살고 있는 그들의 실제 생활이 궁금해서 방문하였고, 수도인 아바나에서부터 최남단의 바라코아까지 주요 도시들을 방문했다.

2013년과 2017년이라는 4년의 시간 차는 쿠바 사회의 변화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 변화는 전 세계가 겪은 2008년 미국발 금융자본의 위기라는 경제적인 상황 때문이겠지만, 쿠바라는 나라는 애초에 미국의 정치경제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지구상에서 미국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어디 쿠바 뿐인가? 쿠바가 1959년 미국으로부터의 해방 이후 여타 중남미 국가(또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미국의 군사력에 정복되지 않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2,500년 전 최초의 ‘역사’를 쓴 헤로도토스는 ‘전쟁’의 원인을 아직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생각’할 줄 모르는 미-인간성에서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막 자연에서 과학(이성)이 태동하던 시기였기에 인간은 이성보다 자연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헤로도토스의 서술처럼 ‘전쟁’은 과거로부터 해 오던 자연스러운 관습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전쟁’이라는 관습에 대해서 ‘성찰’ 하지 않는 한, 하던 대로 전쟁을 할 뿐인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전쟁’에 대해서 성찰하였고 퀴로스왕의 입을 빌어 침략하겠다면 침략당할 각오를 하라는 경고를 했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자연의 이치와도 같은 관습을 성찰함으로써,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복을 누리다 죽는 것이 ‘행복’이라고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이 ‘인간적’이라고 말이다.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자연의 이치에 대해 ‘생각’이라도 해 볼 줄 아는 ‘인간’이 되기를 경고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오늘날의 역사는 자연의 이치보다 더 무서운 ‘자본의 이치’를 넘어서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자연의 이치가 ‘무한 이윤 증식’을 위한 ‘자본의 이치’ 앞에서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이치에 따라 인류의 존망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2,500년의 시간만큼 인간의 ‘생각’이 진보해 왔다면 그 시간의 힘으로, 생각의 힘으로 자본의 이치를 넘어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열어가야 할 때가 된 것도 같은데, 그래야만 ‘인간적’ 일 것만 같은데, 그런데, 헤로도토스의 ‘자연’의 시대로부터 2,400여 년이 지난 100여 년 전 ‘이윤 증식’이라는 ‘자본의 이치’는 그 옛날 어느 시대 보다 더 야만적인 학살을 자행한 ‘아우슈비츠’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켜 인류의 진보를 의심케 했다. 또한, 앞으로 겪을 환경재앙, 끝나지 않을 전쟁을 생각하면 ‘자본의 이치’를 넘어설 대안적인 ‘생각’이 절실해 보인다. 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쿠바를 여행하거나 방문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 위함이다. 공황과 실업과 양극화의 경제위기, 환경재앙, 전쟁 위기의 원인인 자본주의와는 다른 생산방식을 지켜왔지만 쿠바도 전 지구적인 자본독재의 공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중국이나 북유럽보다 쿠바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중남미)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래도 그곳에는 ‘자본독재’를 제어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여기’의 한국(남북한) 사회의 작지만 긍정적인 변화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라도 한국을 넘어 전 지구적인 차원의 긍정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쿠바나 중남미 관련한 여행 글들은 단순히 여행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윤의 무한 증식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생산방식과는 다른 삶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을 것이다. 그 고민이 ‘경제·기후·전쟁’ 위기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나만의 고민이 아닌 전 지구인들의 고민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미 중남미 여행과 관련한 글들을 올렸고 앞으로도 여행 글만 아니라 쿠바를 포함한 중남미 관련 글들을 종종 올리게 될 것이라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혹시라도 궁금해하는 분들이 계실까 봐 쓰는 글이다.



2026.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