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당장 가능한 가장 가까이 느껴지는 해방 세상이라고 밝힌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정희진)은 노동해방의 세상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를 비롯해 모든 사회적 약자의 해방을 의미할 것이다. 전 인류의 해방을 위한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단결하여 냉소주의, 패배주의를 넘어 국가권력, 정치 권력의 성격을 민주적으로 바꾸어내야 할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고마운 관심
관심을 가져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관심은 사랑이라고 하니 말이다. 만사가 그렇듯 관심에도 양면이 있다. 고마운 관심도 있지만 불편한 관심도 있다. 불편하다는 표현은 그러지 말라는 신호다. 그럼에도 계속 그런다면 관심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신호를 주고받는 일이 원활하다면 그들의 관심은 사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소수’라는 존재는 아직 낯설고 잘 모르니 경계할 수 있다. 그렇다고 단지 소수라서 ‘부정적’인 것일 수는 없다. ‘알아보지도 않고 이유 없이 부정되는 것’이 불편함의 이유일 것이다. 나는 권력에 의해 권력을 위해 단지 ‘소수’라는 이유로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현실을 마주하면 그들 소수에 관심을 갖게 된다. 고작 ‘소수’라서 관심도 못 받는 그들이 권력의 관심 대상이 되는 이유는 권력에게는 자기 권력의 존재 이유를 입증해 줄 ‘희생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인 나와 동성애자는 서로 다를 뿐이다. 나는 이성을 사랑하는 것이고 동성애자는 동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권력이 이성애자면 동성애자는 틀린 것이 될 수 있다. 권력이 동성애자면 이성애자는 틀린 것이 될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권력인 것이다. 다수가 권력이 되기도 한다.
다수의 이성애가 옳고 그름을 따져서 옳기에 이성애가 있어온 것이 아니듯 소수의 동성애도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있어왔다. 다만 소수일 뿐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회에서는 동성애가 이성애가 아닐 뿐이지만 어떤 사회에서는 동성애가 틀린 것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직 권력과 다르기 때문에 말이다.
자신과 다름을 존중할 수 있는 권력인가 다수인가가 중요해진다. 권력은 다수에 의해 가능하고 다수는 개인들이 모여서 가능하기에 개인이 중요해진다. 개인은 권력의 희생양이 되기 십상이다. 개인들의 연대가 중요해진다. 개인들이 연대하다 단결하여 다수의 권력이 될 수 있다. 다시 개인이 중요해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단지 소수라는 이유로 틀림이 되는 소수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어떤 형태이든 국가(정부)는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집권 세력의 성격은 주권자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한국을 비롯한 지구인들이 지구를 위기로 몰아넣은 제국주의적인 생활방식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당장 한국 사회에서는 경제적인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세력이 하루빨리 집권하는 것이 우선 과제일 것이다. 경제위기든, 환경재앙이든 앞으로 살아갈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시급한 일로 보인다. 한국만 아니라 전 지구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나는 선진제국의 세력들이 개도국이나 후진국들의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것에서 비롯된 지구 위기의 책임을 되려 희생양들에게 떠넘기는 제국주의적인 생활방식을 바꾸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 과정은 일상 권력과 국가권력의 성격을 바꾸어 나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관심이 고마움을 넘어 사랑이 되려면 먼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알아가며 교감해야 한다. 관심이 자기 권력을 위해 ‘희생양’을 사랑하는 행위가 된다면 관심은 불편함을 넘어 폭력이 된다. 무관심보다 못한 관심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 역시 나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그 길 위에서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때론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다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고 싶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해로울 일도 하면서. 고마운 관심과 함께.
ㅣ부끄러움을 느끼는 희망
약속하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꼭 지킬 것처럼 약속한다. 약속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는 서로의 일이기에 서로에 의지하여 지켜질 것을 믿으며 약속을 하는 것일 테다. 서로 믿고 의지하기에 약속에는 기대도 실망도 따르는 것일 테다.
무언가를 약속함으로써 약속한 일을 지키려 함으로써 약속이 지켜질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약속이 희망을 약속하기도 하는 것이다. 때론 희망 고문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최인석의 소설 <약속의 숲>은 약속이 실망을 넘어 환멸에 이르게 된 현실을 이야기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겠다는 운동가나 정치인의 사회적인 약속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담겨있다. 하여 실망도 하고 반복적이고 의도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약속 앞에서 환멸을 느끼는 것이다.
소설 속 대영은 “사출 공장에서 태호와 더불어, 식기 공장과 형광등 공장에서는 혼자서 노동자들을 향하여 세상에 대해, 세상의 앞날에 대해 확신에 차서, 큰 소리로 외쳤던 그 모든 약속들”을 지키지 못하게 된 현실에 처해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라는 현실 앞에서 더 이상 ‘평등한 세상’을 꿈꾸기를 멈춰버린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멈출 수는 있지만 약속을 포기하는 순간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약속을 포기한 듯 흩어져버린 대영들 속에서 대영은 멈춰 서 있었다.
‘평등한 세상’이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약속을 지키려 했던 대영들은 무너져 내린 희망 앞에서 다른 길을 찾고 있었다.
“지킬 수 없었던 그 모든 약속들을 등 뒤에 버려둔 채” 운동가가 아니라 정치인이 되는 것이 약속을 저버린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자리에서 ‘평등한 세상’의 약속을 이어가고 있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주요 사안들이 벌어질 때마다 정치인들이 보여 온 실망스러운 모습들에 대한 대중들의 환멸과 혐오를 넘어 ‘평등한 세상’을 위해 약속한 것을 지키려 애쓰는 정치인이 되어가고 있는가라는 매 순간의 자각이야말로 약속에 대한 믿음을 지켜줄 것이다.
운동 선배로부터 국회의원 제의를 받은 대영은 자신이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해 왔고, 또다시 그런 약속을 하고 있음을 자각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엇 때문인지. 무엇에 대해선지 알 수 없는 구역질이. 어쩌면 그 자신에 대해선 지도 모를 구역질이 목구멍 안에 가득 차올랐다.” 스스로의 행위에 구역질이 나는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능력자들에게서 아직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다.
미국에서 한국을 “거기”라고 칭하며 달러 세는 낙으로 산다는 태호에게서도 ‘평등한 세상’에 대한 희망은 엿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본질을 짚어내는 그의 ‘냉소’는 미국 혹은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이나 적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사람들은 아무쪼록 자신을 달러로 체험해야 해. 자신을 자신이 아니라 자신에 관한 헛된 환상으로 체험하고, 그 환상 속의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이 아닌 그 환상을 좀 더 그럴듯하게 꾸미기 위해 그 환상에게 자꾸만 뭔가를 사줘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달러를 벌어야 해. 그러기 위해선 자신을 팔아야 하고, 자신을 잘 팔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좀 더 그럴듯한 환상을 꾸며줘야 하고… 이 세상 굴러가는 방식이 그거 아니냐.”
‘평등한 세상’은 멀리 있지 않다. 아니 멀리 있더라도 가는 길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자신의 문제와 관련한 것에서조차 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이 평등한 세상에 대한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기는 어렵다. 백인들의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대영이 딸이 낳은 흑인 손자를 국회의원 선거에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아예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태호의 자본주의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대영의 ‘평등한 세상’을 향한 여정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는 미지수다. 그런데, 딸 윤경의 편지에 대영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윤경은 편지에서 자신이 아버지의 귀중품일 수 없으며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갈 수 있는 자율적 주체라고 말한다. 대영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손자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음을 의식하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부끄러움을 통해 대영은 ‘평등한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다. ‘평등한 세상’은 내일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지만 옆에 있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옆에 있어 주는 것이다. ‘평등한 세상’은 그렇게 운동가든 정치인이든 또 누구든 각자의 옆을 지켜주며 서로의 약속을 지켜가는 것일 테다.
ㅣ‘소수’와 민주주의
‘소수자’의 의미가 ‘수’(數)의 많고,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을 비롯한 지구상에 존재하는 조(兆) 단위의 재산을 가진 극소수의 부자들을 ‘소수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또한, ‘국가기구’의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은 소수이지만 그들을 ‘소수자’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소수자’는 그들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소수’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받는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을 의미할 것이다. 노동자,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아동, 노인, 이주민, 난민들처럼 소수 기득권 세력에 의해 억압과 폭력과 차별로 ‘불평등’을 겪는 사람들을 약자라는 의미에서 소수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숫자로 따지자면 소수가 아니라 오히려 다수에 해당할 것이다. 그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기도 하고 그들 중에서도 더 약한 소수자도 있을 것이다.
소수의 자본독재국가권력이 다수의 약자를 지배하는 부조리와 불합리와 불평등을 헤쳐나가는 것, 그들 소수가 카르텔을 형성하여 다수 약자들 위에 군림하면서 약자들에 대한 혐오를 선동하면서 약자들을 갈라 치기 하면서 경쟁으로 줄 세우면서 ‘서열화’를 구조적으로 고착화하는 것을 깨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소수자들의 운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소수자들의 운동’이 지향해야 할 ‘평등한 사회’로의 이행은 노동자계급이 자본독재국가권력을 대체하여 이행해 가려는 지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착취와 탄압을 당하는 노동자계급과 노동자이면서 또한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아동, 노인, 이주민, 난민이라는 이유로 억압과 폭력과 차별을 당하며 불평등을 겪는 소수자들은 ‘소수자들의 운동’과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동시에 하고 있고 해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라서 소수자가 된 그들에게 ‘자본독재국가권력’이라는 원인은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단결하여 ‘자본독재국가권력’의 성격을 바꾸어 내지 못한다면 소수자들이면서 노동자계급인 그들에게 지금 보다 더 나은 노동해방, 여성해방, 장애해방, 성소수자해방, 아동해방, 노인해방, 이주민해방, 난민해방의 세상은 점점 더 기대하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단결을 꾀하지 않는다면 자기 해방된 해방의 세상이 아니라 자기 고립된 분열의 세상을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에게도, 노동자계급이기도 한 소수자들에게도 ‘민주주의’는 ‘자본독재국가권력’을 대다수의 노동자계급과 소수자들이 실질적인 주인인 국가로 대체해 나가는 만큼의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그만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절대다수인 노동자,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아동, 노인, 이주민, 난민들이 단결하여 부단히 ‘민주화’ 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1인 1표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다. 여기서 말하는 ‘다수’는 말 그대로 표의 많음을 의미한다. 소수의 자본독재국가권력이 다수 노동자들의 표를 얻는다고 해서 자본국가의 독재적 성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국가의 독재적 이데올로기가 다수의 노동자들이 자신을 착취하면서 탄압까지 하는 자본국가권력을 지지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K. 마르크스)인 것이다.
그들 자본독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국가가 자본독재국가인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노동력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착취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자본독재를 대체할 노동자민주주의의 상태를 형성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자본독재국가권력을 지지하는 다수보다 노동자계급과 소수자들을 지지하는 소수의 입장을 존중하며 따를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과 소수자들을 지지하는 이들을 지지하며 함께할 뿐이다. 절대다수인 노동자계급과 소수자들을 지지하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다수결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한국을 비롯한 전 지구적으로 현재 하는 자본독재국가권력을 대체할 구체적인 실천방안들을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제안하며 공개적으로 논의를 이어가는 것도 실질적인 민주국가를 실현하는 중요한 과정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탈성장 코뮤니즘’과 ‘노동자국가’는 노동자들이 활발하게 논의해야 할 시급한 실천방안이라고 여긴다.
2026.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