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14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언론과 미디어로부터의 해방도 쓴다. “미디어 안에서의 진실, 이것은 모두 조작이다”(미하엘 하네케)라는 말은 ‘미디어의 진실’은 자본 권력을 비롯해 언론 미디어 권력의 진실이라는 말이겠다. 풍부한 현실의 일부인 미디어의 진실이라는 말이겠다. 그 미디어를 만든 사람들의 진실이라는 말이겠다. 현실을 가공(조작)하여 만든 자신들의 미디어 내용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미디어의 진실 역시 ‘현실’이라는 기준에 따라 현실에 부합하는지, 진실인지 검증을 해야하는 것이다. 미디어의 진실은 검증의 한 가운데에서 드러나는 것이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더 포스트(The Post)’는 ‘진실을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언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언론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아는 이들에게,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언론이 ‘진실을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렇지만 언론이 마주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그 진실이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의 이익과 관련된 것인 경우에 그렇다.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일반인이나 연예인과 관련된 진실은 열심히 알리면서도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과 관련된 진실은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는데도 알릴지 말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 언론이 처한 현실인 것이다.

영화 ‘더 포스트’의 신문사 ‘더 포스트’ 역시 진실 앞에서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1971년 베트남전쟁 시절.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에 이르기까지 네 명의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국민들에게 행한 거짓을 알릴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정치권력(통치자)과 자본권력(투자자)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는, 아니 그들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언론 ‘더 포스트’가 처한 현실이었다.

국민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신문사의 존폐를 결정할 수도 있는 진실 앞에서 운명의 순간을 맞은 ‘더 포스트’. 외면하면 그만 아닌가라는, 국가에게도 신문사에게도 투자자에게도 이로울 수 있는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은 것은 진실을 알려야 하는 것이 언론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을 외면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더 포스트’는 진실을 선택했다. ‘더 포스트’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과 국민의 중간에 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을 밝히는 진실한 언론의 길을 택한 것이다. ‘발행의 자유는 발행할 때 지켜지는 것’이라며 진실이 담긴 신문을 발행함으로써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 했던 편집장 벤, 그리고 발행의 최종 결정권자였던 발행인 캐서린에게 재판정은 ‘언론은 통치자가 아니라 국민을 섬겨야 한다’는 판결로 ‘더 포스트’의 손을 들어준다.

미국정부의 거짓에 대한 ‘더 포스트’의 폭로는 언론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더 포스트’의 편집장 벤과 발행인 캐서린이 대단해 보이는 이유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압력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용기는 낼 수 있다. 미국정부의 편에서 국민들을 기만하고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는 행위 또한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발행인 캐서린의 결정은 진실을 알려야 하는 언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사실이, 아니 거짓이 거짓임을, 미국 정부가 행한 거짓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정부의 거짓은 베트남에게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자존심 때문에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는 전쟁을 위해 미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냈던 사실을 정당화하는 거짓이라는 점에서 위험한 것이었다.

재판정이 밝힌 언론이 국민을 섬겨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러할 것이다.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권력이 행한 국민들을 기만하는 거짓을 밝혀낼 때 언론은 국민들을 살리는 ‘산소’가 된다는 것. 진실이 곧 국민을 섬기는 일이라는 것.

언론이 밝히지 못하는 진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언론이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국민들은 국가권력이나 자본권력과 같은 권력자들이 국민들을 기만함으로써 국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거짓은 반드시 밝혀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게 ‘더 포스트’의 발행인 캐서린의 말처럼 언론이 ‘역사의 초고’를 쓰게 되는 경우도 있다. ‘더 포스트’에게 박수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ㅣ자의식적인 눈


“영화 안에서의 진실, 미디어 안에서의 진실, 이것은 다 조작이다” 영화 <퍼니게임>과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말이다. 2005년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히든>(Cache/Hidden, 프랑스, 2005)에서도 감독의 질문은 계속된다. 어떤 것이 진실인가?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나?

TV프로그램 진행자인 조르쥬와 출판사에서 일하는 안느 부부의 일상은 아주 평온해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집 앞에 비디오테이프 하나가 섬뜩한 그림과 함께 놓여있다. 그 테이프 안에는 부부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부부의 평온은 깨지기 시작하고 영화는 관객들이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범인은 누구인가? 테이프 내용을 통해 알아낸 집에는 아는 사람이 살고 있다. 마지드. 그는 40여 년 전 조르쥬와 어린 시절을 같은 집에서 보낸 알제리인이다.

마지드는 테이프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조르쥬는 그가 범인임을 “단정”한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마지드의 출현으로 인해 조르쥬의 일상은 점점 불안과 공포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르쥬가 잊고 살았던 과거의 일들... 아니, 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의 오랜 식민 지배를 받아 온 알제리인들이 1961년 10월 파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다 200여 명 이상이 경찰들의 손에 죽거나 센 강에 빠져 죽게 되는데 거기에 마지드의 부모도 있었던 것이다.

이후 부모 잃은 마지드를 조르쥬의 부모가 입양하려고 하자,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기 싫었던 조르쥬는 마지드를 모함하게 되고 마지드는 집에서 쫓겨나 고아원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드가 40여 년 전 조류주의 모함에 대해 앙심을 품고 조르쥬에게 복수를 하러 찾아온 것'이라고 밝혀지면 이야기는 끝날 것이다. 하지만, 마지드는 자신이 테이프를 만들지 않았다고 끝내 부인하고, 그런 마지드에게 조르쥬는 원하는 게 뭐냐고 협박까지 한다. 아니라는데 자꾸만 그러는 이유는 자신의 과거, 과거의 죄 때문이다.

범인이 누구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먼 과거의 죄를 떠올리기 싫은 것이다. 자신의 일상이 침범당하는 것이 불쾌하고 귀찮을 뿐이다. 그의 꽉 짜인 일상에는 '왜 그랬는가?'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런데, 계속해서 또 다른 테이프가 그의 집 앞에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들과 함께 놓이고, 조르쥬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범인이 확실한 것 같은데, 아니라고 잡아떼고 증거는 없고 자신의 과거 기억은 계속 찾아오고 미칠 지경이다. 그러던 중 마지드가 테이프에 대해 말하겠다며 조르쥬를 불러놓고는 그 앞에서 목에 칼을 그어 자살한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일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조르쥬에 대한 항거일까. 평생 식민지인으로 살아온 알제리인들의 억눌린 현실에 대처하는 마지막 방법일까. 내가 안 했다는데, 죄를 덮어씌우고 그러면서, 정작 자신의 죄는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 지식인에 대한 울분일까.

어떤 이는 모함으로 인해 평생을 억울함 속에서 살았을 수도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일상이 조금이나마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일상을 침범당하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지만, 내가 지은 죄는 얼마든지 죄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일까. 늘 지배만 해 온 자들의 역겨운 당당함, 아니, 뻔뻔함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드의 죽음으로 조르쥬는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이로써 모든 것은 끝났다. 범인이 누구이든, 마지드가 왜 죽었든, 그가 알 바 아니다. 자신에게 그토록 중요한 평온한 일상이 되돌아온 것이다.

끝내 감독은 범인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인가? 그 어떤 것도 단정 지을 수 없다. 범인이 마지드 같기도 하고, 그의 아들인 것 같기도 하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죄에 대한 조르쥬의 신경과민이 만들어낸 허구일 수도 있다.

애초에 감독은 범인에는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감독의 목적은 범인이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관객들이 끊임없이 범인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자연스럽게 프랑스 지식인 조르쥬의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그 영화를 비추는 또 하나의 카메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카메라의 주인은 제작자(자본 권력) 일 것이다. 결국, 영화 속 진실은 제작자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영화와 미디어가 거대 자본의 손에 있다는 것, 자본과 권력을 위해 진실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감독의 답은 아무도 믿지 마라거나 네 멋대로 판단해가 아니라 모든 미디어는 조작 가능하니 무조건 믿지 말라는 것일 테다.

카메라에 담긴 영화와 미디어의 진실은 제작자의 진실이라는 사실, 그 진실이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잊지 않고 영화와 미디어의 진실을 대면하는 ‘자의식적인 눈’을 가지는 것이 관객들에게 중요하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럽지 않다. 더 나아가 ‘영화와 미디어’만 아니라 우리의 자의식적인 삶 자체가 오직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하는 ‘자본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럽지 않다. 해서, 진실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늘 부단히 제기되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럽지 않다.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묻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다가가는, 조작되지 않은 진실을 만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더 많은 지식인, 창작자, 대중들이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자의식적인 눈'을 통할 때 진실이 조작되지 않을 가능성, 자본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진실한 삶의 세계를 만날 가능성은 커질 테다.



ㅣ진리에 가까이 가려할 뿐


페터 지마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이상적인 발화상황”을 비판한다. ‘동등한’ 발화를 통해 ‘원만한’ 합의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을 만들겠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이상적’일 수 있다. 페터 지마가 ‘비판적인 대화’를 강조하는 것도 ‘이상적인 발화상황’도 만들어 가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대화가 잘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만큼 대화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화의 조건들도 갖춰지는 것이지, 대화하기 좋은 이상적인 상황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일 게다.

그런 점에서 페터 지마는 기득권 세력의 ‘담합’이나 ‘침묵의 카르텔’, ‘비밀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태도들, 즉, 애초에 대화하지 않겠다는 불통의 태도, 합의에 이르거나 이견을 좁힐 수 있는 가능한 대화마저 차단하고 방해하는 태도, 모든 언어를 이데올로기화하는 음모적인 태도 등을 ‘독백적 술화’라고 비판하는 것일 게다.

그러한 태도 자체가 이미 ‘진리’와 멀어지려나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만이 진리라는 허위를 고백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진리는 대화를 통해서 합의에 이른 것이 아니다. 누구든 자신들이 진리일 수도 있다.

그렇듯, 진리는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진리가 진리임을 검증해 나가는 것일 뿐이다. 한데, 진리가 무엇인지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겠다는 태도는 진리 자체를, 자신들의 진리마저 부정하는 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페터 지마는 ‘이론과 이데올로기’를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검증된 과학에 가까울수록 이론에 가낍고, 과학과 멀어질수록 이데올로기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 관계는 언제든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진리와 허위의 관계도 그럴 것이다.

과학이라면, 이론이라면, 검증을 통해 부단히 진리에 가까이 가려 할 뿐이다. 그런 만큼 진리일 가능성은 커질 뿐인 것이다.




2026. 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