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15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생산수단의 민주적 소유가 해방을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한다면, 그를 위한 여러 필요조건들 중에 ‘변증법적 사유’가 있다. 현실에 대한 사태 자체에 대한 충실한 사유를 통해 이전과 다른 현실로 사태로 넘어가기 위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것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도약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현실에 대한 촘촘한 미시론적 사유, 그 사유를 현실과 대질하는 반성적 사유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현실을 구성하는 본질 파악을 통해 질적 변화를 위한 적합한 실천, 그 실천의 경중도 밝혀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따라잡고 있을 때 주체들의 실천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사태 자체로 강제성이 있다


그것은 개념들을 불변적인 것으로 고수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변경함으로써 -달리 말해 그것들의 존재가 생성이며, 진리 자체가 본래 역동적임으로써- 일종의 진리 개념의 해체와 같아지고, 특정한 것 또는 규정된 것을 우리에게서 슬그머니 앗아가는 일종의 보편적 상대주의와 같아진다는 생각입니다.(변증법 입문 45)

보편적 상대주의가 변증법 아니냐. 고정된 개념을 다 무시하고 무엇을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냥 뺏어버리고 부정해 버리고 끊임없이 생성을 얘기하고 이것은 보편적 상대주의 아니냐. 이렇게 의심을 한다는 것이다.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첫째 척도로 헤겔이 들고나온 것이 ‘진리는 전체다’라고 얘기를 했는데 아도르노는 진리가 꼭 전체일 수는 없다. 그건 관념론적인 것이다. 유물론 입장에서는 열려 있다.

그럴 때 그래도 사태 자체를 놓고 진지하게 면밀하게 집요하게 들여다보면 그 자체의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하고, 그 한계도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나아가야 하는 필연성이 나타난 것이다. 사태 자체로 강제성이 있다. 인식에서 구속성을 갖는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아도르노는 그걸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개별 인식 또는 사태 자체를 들여다봤을 때 그때그때 나타나는 인식이 벽에 부딪힌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걸 돌파해서 다음 단계로 가야 하는 건 필연이라고 봤다. 끊임없이 넓혀 나가는데 전체까지 가야만 진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l 모델


아도르노가 좋아하는 개념 중 하나가 ‘모델’이다. 자신의 주장은 진리니까 받아 적어서 외워라가 아니고. 내가 이렇게 사고를 하니까 이걸 모델 삼아서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변증법적 인식은 기존의 인식에다 새로운 빛을 쪼인다는 것이다. 새로운 빛을 쪼여서 그 과거의 인식이 새롭게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다. 진리를 딱 고착시키려고 하는 걸 어떻게 피할 것이냐 했을 때, 이것은 하나의 모델이니까 이걸 통해서 여러분들도 스스로 해보라는 것이다. 들뢰즈가 기존 철학에 반발하는 이유 중 하나가 기존 철학들이 공식에 맞춰서 틀을 딱 짜가지고 사고를 안 한다는 것이다. 사고의 생산성이 없다는 것이다. 개념 가지고 뭘 하는 것이 대부분 그렇다는 것이다.

개념틀들 가지고 그걸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반복해서 쓸 뿐이라는 것이다. 그걸 놓고서 근본적으로 따지는 것들을 너무 안 한다는 것이다. 그런 취지는 아도르노하고 비슷하다. 공식들에 맞춰서 외우고 안다고 생각하고 끝내고 이런 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사고를 다시 하라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주장을 ’모델‘로 삼을지 말지는 독자의 몫이다. 그렇게 스스로 판단하도록 열어두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된 주장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의 중요한 주장 중 하나가 ’동일성 사유‘를 경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념을 통해서 사유를 하되 개념과 대상을 동일시하지 말라며,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은/못한 비동일자가 사태의 본질일 수도 있다며, 사태는 무궁무진하니 ’사태 자체‘에 충실한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사태 자체‘에 충실하기 위한 여러 주장들 중에서 자신의 것도 그 중 하나로 참고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자신이 유일한 모델이니 참고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여러 모델 중 하나이니 참고’만‘ 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무엇이 진짜인가. 누가 진짜 모델인가. 중한 것은 사태 자체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짜는 드러날 뿐이다.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 일 것이다.



ㅣ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가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은 대상들을 개념화해갈 때 동일자로 묶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렇게 안 되는 영역은 계속 남는다. 그 영역을 보통은 잘라버린다. 그 개념으로 파악 안 된 걸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이렇게 되는데, 아도르노는 그 영역이야말로 철학이 다뤄야 할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일시’는 사유에 불가피한 면이라고 본다. 그렇지만 동일시하는 것만으로 끝내버리고 비동일자를 배제할 때 이른바 ‘동일성 사유’에 빠진 것이라고 비판을 받는 것이다. 동일시하는 것 때문이라기보다 동일시는 사유의 기본이고 그것에 매몰되는 것, 그것에 대한 자각이나 비판이 없는 것, 이게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끊임없이 사유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개념을 통해서 파악된 것들을 놓고 그것들이 실제 대상과 부합하는지 안 하는지 거기서 빠져나간 것들의 중요성이 뭔지 따지는 작업을 통해서 사유의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념을 통해서 본질을 파악했을 때 파악된 본질이 더 중요하냐 아니면 비동일자 영역이 더 중요하냐, 물을 수 있다. 아도르노는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얘기를 한다.




2026.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