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나의 해방을 쓴다. 해방 세상을 위해 우선 자기 해방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자기 해방은 관계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든 노동자든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성소수자든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관계적 존재인 것이다. 가족, 학교, 직장, 이웃, 국가 등등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상호 인정에 기반한 민주적이고 평등한, 불평등과 차별 없는 관계는, 관계의 해방은 그 관계들에 연루된 자기 해방을 위한 필요조건이면서 생산수단의 민주화와 같은 구조적 평등을 위한 충분조건의 전제이기도 한 셈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돈으로 살 수 없는 삶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돈이 없으면 삶을 살 수(live) 없을 뿐만 아니라 ‘생활’조차 힘들다는 사실일 것이다. 또한 돈으로 살 수(buy)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돈 버는 데 하루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돈으로 살 수(buy) 없는 삶을 살고 있고 그런 삶을 살 수(live) 있다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일 것이다. 누구나 의지만 있으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자유롭고 행복한 곳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에게 ‘돈으로 삶을 살 수(buy) 없다’는 말도, ‘돈이 없으면 삶을 살 수(live) 없다’는 말도 모두 맞는 말로 들린다. ‘삶’의 의미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돈으로 살 수(buy)’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중해 보인다.
돈이 없어도 생활은 할 수 있는 사회라 하더라도 ‘돈’은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돈이 없으면 당장 생활조차 힘든 것이 자본주의 사회이지만, 해서 ‘돈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지만, 그럼에도, 생활을 해결해 나가면서, 사랑, 자유, 행복과 같은 ‘돈’으로만 살 수(buy) 없는 ‘가치’들을 추구하는 삶은 필요하다는 사실이 중해 보인다는 것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돈으로 살 수(buy)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은 자본(돈)과 어떻게 관계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자본이 지배하고 있지만, 돈은 필요하지만, 자본과 돈의 노예는 되지 않는 삶을 지향하는 사회나 개인이라면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처럼 ‘돈으로 생활을 해 나가면서, 돈으로 살 수(buy) 없는 가치들을 추구하는 삶’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그런 사회를, 그런 개인을 지향해 나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의 문화와 법제도적인 장치들을 만들어가면서 말이다.
ㅣ상호 인정의 관계
다시, ‘관계’의 문제, ‘상호 인정’의 문제입니다. 차별 없이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는 어떤 모습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그게 ‘왜 문제인가?’라고 보는 입장이 존재합니다.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상호 인정이 아니라 승자가 더 인정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그러니 승자가 되기 위해 생사를 건 투쟁을 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 있는 것이죠.
‘상호 인정’의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승자의 입장에서 그럴 수 있겠습니다. 패자가 승자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승자가 패자를 인정해 주는 것은 승자의 지위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에서라는 것이죠. 인정을 받고 싶으면 승자가 되라는 입장이죠. 이런 입장은 승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대 자본과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 그들과 동맹하거나 그들에 기생하여 상층의 권력 카르텔을 형성하는 자들이 실재하는 현실 세계의 승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 관계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인정’의 문제는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자식, 부부, 친구 관계에도 존재합니다. 그 역시 승자와 패자를 명확히 가르려는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 권력에 의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자본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죠. 그들 승자의 입장이 한 사회의 지배적인 입장이어서인지 패자도 그런 입장을 가지기도 합니다.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고 승자를 따르라는 것이죠. 인정받겠다면 싸워서 승자가 되라는 것이죠. 그런 승자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불순한 것이라고 말이죠.
한편으로, ‘상호 인정’의 관계를 지향하는 입장도 존재합니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사는, 그렇게 공멸해 가는 끝없는 전쟁 같은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죠. 모두가 승자일 수 있는 사회는 아니더라도 승자와 패자만 존재하는, 소수만이 승자이고 대다수가 패자인 사회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 사회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인정을 받겠다는 욕망은 인간 본성이기에 ‘생사를 건 투쟁’(헤겔), ‘인정 투쟁’(악셀 호네트)은 불가피하지만,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정해 줄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 주어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죠.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정해 줄 상대가 필요하니 상대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은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관계적 존재, 서로 의존(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해서, 어떻게 ‘관계’를 이루며 살 것인가라는 ‘관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겠습니다.
ㅣ모순의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차이 나는 것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아도르노) ‘차이와 모순’에 관한 표현에서 아도르노의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오직 문제는 ‘모순의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에 있다고 여긴다.
아도르노의 표현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아도르노가 ‘유토피아’를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아도르노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면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도르노가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목을 끄는 것이다.
만일, 아도르노가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를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이미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립물의 통일의 상태인 ‘모순의 바다’에서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면 그뿐 아닌가. 그렇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으로서 상호 전도의 상태를 반복하면 그뿐 아닌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현실을 ‘모순의 바다’ 그 자체로 인식하는 이들에게,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의 상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일 수밖에 없다. 오직, 주인이 되기 위한 생사를 건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차이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상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지, 주인과 노예가 없는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상태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한편으로, 현실에 ‘모순의 바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오직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의 상태와 같은 유토피아는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엄연히 현재 하는 ‘모순의 바다’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그 ‘모순의 바다’를 건너지 않고는 유토피아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모순의 바다’를 상정하는 아도르노의 현실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겠다면 현실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2026. 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