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시간은

by 영진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인지 아버지가 없는 내가 부럽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다면서 말이다. 그에 대해 나는 별 다른 감흥없이 듣고 있는 게 전부였다. 애초에 나에게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재에 따른 결핍도 느끼지 못했고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아버지에 대해 해 줄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란 존재의 부재를 다른 가족들이 메워주었기 때문에 결핍을 못 느끼며 살았을 수도 있겠다. 그러다 몇 해 전에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기억에 없는 아버지가 생각난 적이 있다. 그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인 아버지가 아리를 목말 태우고 자랑스럽게 동네를 다녔다는 장면에서 나의 아버지도 나를 목말태워 그리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 것이다. 소설 속 아버지가 사회주의라는 해방 세상을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 나의 아버지도 판사가 되어 정의로운 해방 세상을 만들려 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기도했다. 나의 아버지가 국가권력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별 다른 감흥은 없다. 더 이상 국가권력에 의해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부다.


그처럼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의식할 필요없이 잊혀진 존재로 여기며 살았는데 작년 가을에 문득 아버지가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깜짝 놀랐다. 수십년을 살아오면서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겪는 감정이었다.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깊은 글들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나 싶다.


남도 아니고 나를 존재하게 한 두 분 중 한 분인데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가 있는 곳으로 언제든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 보고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다.


나의 삶에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적지 않았다. 사람을 크게 여기며 살았다. 사람들을 좋아했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기도 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부재를 의식하지 않으며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들 때문이었을 것이고 나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 사람들을 더 찾았던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몇 해 전부터 사람들에 대해 소홀해진 것도 사실이다. 큰 의미나 이유는 없다. 연구하고 글 쓰는 나의 삶에 조금 더 충실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누군가는 서운해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시간은 그런 감정들이 나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2026. 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