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대해서는, 또 일반적으로 이론적 사고에 대해서는 그것이 단지 개념만을 처리할 수밖에 없는 한 관념론적 예단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은 개념들이 지향하는 것들을 단지 개념들을 통해서만 다룰 뿐이고, 결코 그것 자체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로써 철학에 따르는 허위와 책임에 반성하고, 이를 통해 가능하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철학의 시시포스적인 작업이다. 철학은 그 존재적 기저를 텍스트들 속에 고착시킬 수 없다. 그런데 철학은 이 존재적 기저에 대해 논함으로써 이미 그 기저를 그것과 구분 짓고자하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놓는다. 피카소가 처음 신문 조각들로 자신의 그림들을 교란시킨 이후 현대 예술은 그에 대한 불만을 기록하고 있다. 모든 몽타주는 그러한 데에서 유래한다. 사회적 계기는 이 계기를 모방함으로써 마치 예술적 능력을 지니는 것처럼 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예술에 대한 사보타주를 통해 예술 속에 스며듦으로써 미적으로 권한을 얻는다. 예술 자체는 스스로 순수한 내재성을 지닌다고 하는 속임수를 깨뜨리며, 경험세계의 파편들은 그 자체의 연관을 버리고 내재적 구성의 원칙들에 따른다. 예술은 조잡한 소재들에 대한 가시적 양보를 통해 정신, 즉 사유와 예술이 타자에 저지르는 어떤 것을 보상하고 싶어한다. 정신은 그 타자에 관여하여 그것이 말하게(580)끔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여러 예술 사이의 경계선을 흐리는 작업이나 해프닝에 이르는 현대 예술의 반의도적, 비의미적 계기가 지니는 규정 가능한 의미다. 이로써 전통적 예술에 대한 위선적 졸속 판결이 이루어진다기보다, 오히려 예술에 대한 부정까지도 예술 자체의 힘을 통해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예술 가운데 사회적으로 이제는 가능하지 않게 된 것도 그 때문에 모든 진리를 상실하지는 않는다. 그와 같은 것은 역사적 암반층 속에 가라앉는다. 이 암반층은 단지 부정을 통해서만 살아 있는 의식에까지 전해질 수 있지만, 이 암반층이 없으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말없이 지시해 주는 계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경우 자연과 작품을 그렇게 엄밀히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계기는 파괴적 계기와 대립하는데, 예술의 진리는 이 파괴적 계기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러한 계기는 형식을 이루는 힘으로서 그 자체의 척도가 되는 것의 힘을 인정하는 가운데 존속한다. 이러한 이념에서 예술은 평화와 유사하다. 미리부터 화해를 예상해도 예술은 허위가 되겠지만, 평화에 대한 전망이 없어도 마찬가지로 허위가 될 것이다. 예술에서 미는 현실적으로 평화로운 상태의 가상이다. 형식의 억압적 폭력도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것을 결합하는 가운데 현실적 평화를 지향한다.(581)
ㅣ출처
미학 이론
테오도어 W. 아도르노 지음, 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5.
원제 : Asthetische Theorie
아도르노 [미학이론]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