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칸트의 방식으로 오늘날에는 예술을 한 가지 기정사실로 대하는 태도가 적합할 것이다. 예술을 변호하는 사람은 이미 이데올로기들을 만들어내고 예술 자체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만든다. 아무튼 제반 제도와 거짓된 욕구가 함께 만들어내는 장막 너머 현실 속의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예술을 요구한다는 사실, 그러한 장막이 감추는 것을 옹호해 줄 예술을 요구한다는 사실과 관련해서는 생각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논증적 인식도 현실에 도달하며 그 나름으로 현실의 운동 법칙에서 생겨난 제반 비합리성에도 도달하지만, 현실의 어떤 것은 합리적 인식으로 다루기 어렵다. 합리적 인식에는 고난이 낯설다. 합리적 인식은 고난을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완화하는 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고난을 경험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바로 그런 표현이 합리적 인식에 대해서는 비합리일 것이다. 고난을 개념화한다면, 그것은 아무 말도 없고 일관성도 없을 것이다. 이 점은 히틀러 이후의 독일에서 볼 수 있다. 아마 이해할 수 없는 공포의 시대에는 브레히트가 슬로건으로 택한, 진리는 구체적이라는 헤겔의 명제가 예술을 통해서만 아직 충족될 것이다. 예술을 곤궁에 대한 의식이라고 보는 헤겔의 모티프는 그가 예측할 수 있었던 바를 모두 초월하여 진실임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그것은 예술에 대한 헤겔 자신의 판결, 즉 문화 염세주의에 대한 반론이 되었다. 이러한 문화 염세주의(51)는 겨우 세속화된 그의 신학적 낙관주의, 즉 현실적으로 실현된 자유에 대한 기대를 선명히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이 어두워짐으로 인해 예술의 비합리성, 즉 극단적으로 어두워진 비합리성은 합리적인 것이 된다. 새로운 예술을 초조하게 옹호하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좀더 뛰어난 감각으로 새로운 예술의 적수들이 새로운 예술의 부정성이라고 칭하는 것은, 기존 문화로부터 축출된 것들의 요체다. 새로운 예술은 그런 것들에 끌린다. 예술은 이처럼 축출된 것들에서 쾌락을 느끼는 가운데, 단지 축출하는 원칙에 헛되이 저항하는 대신 이러한 원칙 내지 재앙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예술이 동일시를 통해 재앙을 말하는 것은 재앙의 힘이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재앙에 대한 사진술이나 가짜 축복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것이야말로 어두워진 객관적 상황에 대한 진정한 현대 예술의 입장을 말해준다. 다른 입장은 모두 달콤한 태도로 자체의 허위를 드러낸다.(52)
ㅣ출처
미학 이론
테오도어 W. 아도르노 지음, 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5.
원제 : Asthetische Theorie
아도르노 [미학이론]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