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21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문학과 예술도 해방을 쓴다. 그러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문학과 예술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리얼하게 형상화하여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모순을 넘어서고 있는 객관적 가능성으로서의 현실을 작품 속에 꽃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방을 할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작가와 독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다양해진 문학과 예술의 매체들을 통해 해방을 읽는 수용자이기도 하면서 해방을 쓰는 생산자이기도 하다. 주체적으로 해방을 창작하는 문학과 예술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겠다. 그러한 사실이 해방적인 삶을 살아가는 객관적 가능성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벌레로 변신해 있었다. 새벽같이 출근해 가족과 회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다 꿈을 꾼 것인가. 시골에서 온 사람은 무슨 억울한 사연이라도 있는지 평생을 법 앞에서 서성이다 생을 마감한다. 법 앞의 문지기는 말한다. 당신에게는 이미 문이 열려있었는데 당신이 들어가지 않은 것 뿐이오. 과연 그런가. 법은 누구에게 열린 문인가.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사형을 선고하는 유형지는 어디인가. 아직도 여전히 어디에나 있다. 제국적 자본주의의, 권위주의적인 권력의 동일성의 원리가 작동하는 한 지금 여기가 언제든지 유형지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에서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투쟁을 통해 제국적 자본주의를 권위주의적 권력을 넘어설 객관적 가능성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겠다. 아무리 읽어도 없다면 직접 창작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프란츠 카프카를 넘어설 기회 아닌가.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카프카의 변신


어느 날 아침 아들이 ‘흉측한 벌레’로 변했다. 그레고르 잠자는 부모님과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하여, 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 5시까지 회사에 출근하는 외판원이었다. 고된 중노동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해서도 일만 생각하는 ‘일벌레’이기도 했다.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몸을 보며 외판원의 직업병인 독감의 징조라고 생각한다. 벌레로 변한 그때 이미 그는 인간의 의식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혹사당하는 노동자의 직장 생활을 떠올려보면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것을 노동자의 삶의 비유라고 해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그를 발견한 가족들과 연락을 받은 회사 매니저나 사장, 심지어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자신마저도 걱정하는 것은 그레고르가 아니라 그레고르의 ‘출근’이었다. 출근해야 하는데, 출근해서 일해야 하는데, 일을 해야 그레고르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사장도 살 수 있는데.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자본주의의 현실이다.

‘출근’ 하지 못하는 그레고르는 아들에서 차츰 벌레가 되어간다. ‘돈을 벌어야 인간일 수 있는’ 자본주의. 돈을 벌지 못하면 사람대접 못 받는 자본주의. 가족도 회사도 먹여 살려야 했던 ‘일벌레’ 그레고르는 가족들과 사람들에게 벌레 취급을 받다가 서서히 버려진 채 죽어간다. 가족들도 사장도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를 바 없다. 그들 중 누가 어느 날 벌레로 변한다고 해도, 벌레 취급받다 죽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자본주의인 것이다.

카프카는 책임감 있는 장남(가족)으로서, 우수한 성적의 모범생(학교)으로서, 독실한 종교인(유대교)으로서, 유능한 직원(회사)으로서 가족들, 동료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던 성실하고 유머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한 사회의 지배 질서에 충실하려 했고, 또한 보통 사람들처럼 억압적이었던 지배 질서를 억압적으로 느끼며 살았다. 또한 보통 사람들처럼 억압으로부터 끝내 떠나지 못하고 억압을 견디다 ‘벌레’로 변하는 꿈까지 꾸었을 것이다.

카프카처럼 억압적인 지배 질서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것은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기도 하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도피는 도피 그 자체가, 떠나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도피하지 못하고 지배 질서의 억압을 견디며 사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의 도피처를 꿈꾸거나 만들면서 도피처가 있다는 것에 위안 삼으며 도피처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기도 한다.

카프카의 삶은 그러했지만 또한 카프카가 살았던 지배 질서를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충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가족이, 이웃이, 동료가 벌레로 변신하지 않도록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간다. 지금과는 다른 지배 질서를 만들며 살아간다.(F. 카프카의 [변신] 참고)


ㅣ그가 살려했던 삶을 살았는가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법 앞에서’ 시골에서 온 사람은 서성거린다. 서성거리다 끝내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못하다가 못하고 만다. 시골에서 온 사람은 “법이란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게 열려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랬던 그였지만 “그럴 수는 있지만”, “지금은 안돼.” “그렇게 끌린다면 내가 금지하더라도 들어가 보게. 나는 힘이 세지. 그런데 나는 최하급 문지기에 불과하다네.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더 힘센 문지기가 서 있지”라고 말하는 문지기를 유심히 살펴보다 입장이 허가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그의 생각과 현실은 달랐지만 허락될 때까지 여러 해를 기다린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의 불운을 큰 소리로 저주하기도 하고 문지기의 모피외투에 붙은 벼룩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그렇게 시골에서 온 사람은 나이가 들고 눈이 멀고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리고 임종을 앞두고 문지기에게 마지막으로 묻는다. “모든 사람이 법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지난 수년 동안 나 이외에는 아무도 들여보내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이지요?” 문지기가 답한다. “이곳은 너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가받을 수 없었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오직 너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가서 문을 닫네.”

시골에서 온 사람은 왜 법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까. 그에게 법은 곧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가 살아가야 할 사회의 질서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다면 살겠다면 법 안으로 들어가려 해야 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까. 죽음을 앞둔 시골에서 온 사람에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은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슨 노력을 했습니까. 문지기의 말처럼 그 문은 당신에게만 혹은 당신에게는 허락된 문이었습니다. 아니, 당신 말처럼 법은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물음은 그가 법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는, 그가 들어가려 했다면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전제 하에 의미 있는 물음이다.

그 물음에 대해 시골에서 온 사람, 아니 카프카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지기의 말처럼 애초에 그가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그는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답하지 않은, 답하고 싶지 않은, 답할 수 없는, 그가 법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유를 ‘두려움’과 ‘거부감’때문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애초에 법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고, 두려움이 거부감을 낳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들보다 중요한 것은 그는 법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는 한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의 삶이 만든 그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길들여지고 길들여지다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길들이면서 살아온 그런 사람인 것이다. 법의 허락을 기다리거나 허락을 구하려 할 수는 있지만 법이 허락하지 않는 한 스스로 법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그를 길들인 사회의 지배질서였던 것이다.

그에게 물어야 할 것은 그 삶이 자신이 살려했던 삶인지 아닌지. 그것이다. 그는 그가 살려고 한 삶을 살았나? 사회의 지배질서가 어떠하든 법 앞에서 서성거리는 삶이 그가 살려했던 삶이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물음에 그가 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애초에 그렇게 길들여진 그의 삶은 그가 선택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법 앞에서 서성거리지 않도록 살아왔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법 앞에서 서성거리는 삶을 살도록 길들여졌던 것이고 그것이 그가 살 수 있는 삶이었던 것일 뿐이다. 그가 다르게 살 수 있는 길은 다른 법을 가진 곳에서 다시 태어나거나, 그곳과는 다른 법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곳에서 여느 사람들처럼 그들에게 허락된 법 안으로 들어가거나 법을 새롭게 만드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방식, 그가 살 수 있는 삶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럼에도 그의 삶에서 그가 살려했던 삶을 살았는가. 그것만이 중요해진다.(F. 카프카의 [법 앞에서] 참고)



ㅣ머물지 않거나 떠나거나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사형을 선고받은 병사, 몸에다 죄명(罪名)을 새기며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사형기계,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장교, 유형지는 어디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기지만 그보다 궁금한 것은 그런 유형지의 상태에 대한 판단을 위해 초대된 탐험가의 태도이다.

새로 부임한 사령관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충분히 장교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령관은 제삼자의 입장일 수 있는 탐험가를 초대하여 자신의 결정에 객관성을 더 하려고 한다. 하지만 탐험가는 사령관에게 시원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함께 그 유형지를 떠나고 싶어 하는 시민들을 뿌리치고 혼자 떠나버린다.

장교에게 병사(시민)는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질 정도로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장교를 대하는 사령관과 탐험가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책임하고 방관적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장교와 사령관 둘 다 탐험가에게 자신을 편들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탐험가가 해야 할 일은 누구를 편들기 이전에 사태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다. 그 판단이 어느 한쪽에 유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탐험가는 자신의 임무를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법(法)을 집행하는 일은 사령관의 몫이고 자신이 책임지지도 못할 것이면서 시민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세상에 하찮은 존재가 있을까. 해서 하찮은 존재는 하찮게 대우받아도 되는 것일까. 그 어떤 존재가 그 어떤 존재에 비해 어떻게 하찮다는 것일까. 감히 누가 어떻게 사람을 사람과 비교하여 낫고 못함을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권력 없는 이들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과 그런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인간은 하찮게 대우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이들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지 않거나 저항은 하지만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저항하지 않는 이들은 하찮은 존재, 아니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면 무섭지 않을까.

자기와 다르면 틀린 것이라는 생각에서부터 600만 유태인 학살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다. 제각각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하거나 같은 구석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 비슷하거나 같아지려고 애쓰기도 한다.

하나 애초에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무엇이 다른지 알지 못한다면 비슷하거나 같아서 좋은 상태에 이르기는 어렵다. 그저 다르게 살아가다 때로 서로 틀렸다며 싸울 뿐이다. 자신과 왜 다르냐며 같아지라고 강요할 것이다. 그럴수록 같아지기는커녕 더 멀어질 뿐이다. 그렇게 일상적인 폭력은 비일상적인 학살로 이어졌었다.

자신과 같기를 강요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유형지를 무책임하게 방관한다면 유형지는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유형지를 해소하기 위해 유형지에서 행해지는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면 유형지는 또한 반복될 것이다. 탐험가가 자신이 만들지 않은 사회 질서인 유형지에서 머물지 않거나 떠나거나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F. 카프카 [유형지에서] 참고)




2026.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