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20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라기 보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이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지금 여기를 지양止揚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사는 것을 해방이라고 부를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지금 여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자유, 다른 공동체, 다른 자신을 사는 것을 말한다. 조금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을 말한다. 다른 권력, 다른 생산수단의 소유 방식, 다른 자신의 매 순간의 탄생을 의미한다. 다만, 그 시작은 늘 지금 여기에서부터, 지금 여기의 자유, 공동체,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자유, 공동체, 자기통제

브링크만의 주장에 따라 모든 인간 행위는 자기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행위라고 이해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기에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도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방종이나 범죄에 대한 규정과 처벌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도덕이나 법과 같은 규칙이나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일 테다.

그래서일까. 브링크만은 자유와 관련하여 ‘오직 개인적인 선택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의 운명을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의 관점보다 ‘자유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이루어진다’는 카뮈의 관점을 취한다.

브링크만은 ‘자유는 욕망대로 사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추구할 가치가 없는 욕망이라면 스스로 억압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추구할 가치가 없는 욕망은 어떤 욕망이며 누가 결정하는가. 욕망을 스스로 억압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어떻게 억압할 수 있으며 왜 억압해야 하는가. 물음들이 인다.

브링크만에 따르면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성찰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추구할 가치가 없는 욕망을 억압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법과 제도와 같은 규칙에 구속되지 않을 것이며 그럼으로써 개인들은 자유로워지고 공동체도 유지된다는 것이다.

브링크만의 ‘자유론’에서 책임과 의무, 자기 통제가 강조되는 것은 우리가 ‘공동체의 일부’라는 전제 때문일 것이다. 원하는 것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자유도 그와 같은 자유가 보장되는 공동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것은 중요하다.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브링크만이 주장하는 자유는 불가능할 것이다.

브링크만의 자유를 위해서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공동체를 보호할 줄 아는 자기 통제력을 가질 수 있는 윤리적인 형태의 양육과 교육’이 필요하겠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의 많은 사회에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자(者)들은 ‘특권’을 가진 자들이다.

‘특권’ 자체가 없어져야 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공동체의 대다수 구성원들의 ‘자기 통제’가 책임을 다하지 않는 특권층의 무책임을 문제 삼는 일을 스스로 통제하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는 ‘자기 통제’는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특권을 누리려 할 뿐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철저한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개인이 스스로 자신을 존재하게 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다함으로써 자신의 자유도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려는 브링크만의 관점은 오늘날의 전 지구적인 ‘경제·환경·전쟁’ 위기를 야기하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본독재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브링크만을 따라 자기를 통제하여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공동체를 보호하는 책임을 다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자유를 가능하게 해 줄 가장 강력한 방법과 무기는 그러한 자유로운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갈 나, 너, 우리일 것이다.



ㅣ자유의 영역은 필요의 영역이 충족될 때 시작된다


‘자유의 영역은 필요의 영역이 충족될 때 시작 된다’는 맑스의 언명은 맑스 자신이 밝힌 ‘자유로운 무산노동자’의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와 연관이 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로운 노동자가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스스로의 노동력을 스스로의 상품으로서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판매할 다른 상품을 갖고 있지 않고 자기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 물적 조건에서 떨어져 자유롭다는 이중의 의미에서이다.”

노동하는 노동자는 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마음대로 처분할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넘겨야만 한다는 의미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자본국가에 예속되어 있다.

그래서, 자신의 노동력을 마음대로 처분은 할 수 있지만 계약(法)에 의해서 노동력을 처분한 노동의 조건(임금 및 노동시간, 노동환경)은 달라진다는 점에서,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한 노동자의 자유가 가진 모순이 발생한다.

그와 같은 모순이 해소되어 노동자가 자유로워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자본 국가와의 대등한 관계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대등한 상태는 사실상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계급이 사라질 때 가능한 상태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자본독재국가에 예속되어 있다면, 자신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하여 자신이 원하는 노동조건에 합당한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이 애초에 자본독재국가의 법과 제도의 제약을 받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개인의 자유의지로 넘어서기 힘든 조건으로 계약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자유의 영역은 필요의 영역이 충족될 때 시작 된다’는 맑스의 언명은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집단적 자유의지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가 개인적으로 해결 가능한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지배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필연적인 법칙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유의지의 구현은 개인적인 삶의 양식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법과 제도, 자본독재국가권력을 넘어서려는 것으로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ㅣ이기적 이타주의


2018년 즈음의 관심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한 사회의 양립의 문제, ‘개인들이 자유롭게 살면서도 평등한 사회’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경제 양극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그에 따라 더 자유로워진 기득권의 득세와 어쩔 수 없이 자유로워진 더 많은 개인들의 다양화로 인해 생겨난 문제의식이었던 듯싶다.

이타적이기 위해 이기적인, ‘이기적 이타주의’를 살겠다는 것이 그즈음 나만의 개인적인 결론이었다. ‘모두’를 위해서만 열심히 살겠다는 것이었다. ‘모두’를 위해서라면 이기적이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개인이 무엇을 하든 어떻게 살든 ‘모두’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모두’를 위하면서 ‘모두’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삶은 어렵지 않다. ‘모두’의 사회적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심이나 법, 책임과 같은 기본적인 윤리를 지키는 것이다. 개개인이 스스로 지키면서 서로에게 지키라고 요구하고 요구받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한 사회’가 양립하기 위한 시작이자 끝이라고 여긴다.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책임을 다하고 법을 지키는 것으로도 개인의 자유와 평등한 사회는 양립 가능할 것이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개인들이 다양하게 평등한 사회를 요구하며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자유와 평등한 사회’의 양립을 바라보며 자신의 자유도, 평등한 사회도 조금씩 지양해 나갈 줄 아는 개인들이 되도록, 그런 개인으로 스스로를 지양해 나갈 줄 아는 개인들이 그런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를 살고 있어야 하겠다.

남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그렇게 살고 있는 수밖에 없겠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자신들도 있고, 지금 여기에서 자신만큼은 실현 가능한 상태이기도 하고, 그런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것이 평등한 사회이기도 하고, 그런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평등할 것이고.

핵전쟁, 기후위기, 경제위기와 같은 인류재앙을 야기하는 근원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바꾸어가는 과정도 여러 모습일 것이다. 각자가 재앙을 경험하는 강도나 재앙을 문제 삼으며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것이다. 자기는 자기 삶은 자기 것이고 자기 삶의 주인은 자기인 것이고 자기 삶에 대한 최종 결정자는 자기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바꾸기 위한 방법은 같거나 비슷하거나 다르다 하더라도 그 이전에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인류재앙의 근원에 대해 ‘동의’를 구하고 ‘공감’을 얻는 일이라고 여긴다. 그런 ‘동의’와 ‘공감’ 없이 ‘자기들’이 행하는 행동의 결과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자기들’에게만큼은 의미심장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인류재앙을 문제 삼겠다면 ‘동의’와 ‘공감’을 위해 애쓰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싶다. 머리 맞대고 논의하고 있을 만큼 인류의 시간도, 각자의 시간도 많지 않다는 것 또한 인류재앙이 낳은 비극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 인류재앙을 돌아보는 일은 ‘자기’라는 선물을 있게 한 ‘인류’에 대한 마지막 배려가 아닐까 싶다.




2026.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