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나의 해방은 내가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는 나의 해방을 쓰는 것이고, 당신의 해방은 당신이 쓸 수밖에 없으니 당신이 써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동일하지 않지만 서로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의 해방을 함께 써나갈 수 있을 것이고 써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홀로 때론 함께 우리의 해방을 쓰며 우리를 서로 연결하는 것은 해방 세상의 가능성을 키워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연결의 이름이 연합이든 연대든 단결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그 연결의 선이 가늘든 굵든 그 무엇으로 연결되든 스스로 연결하고 연결되며 해방을 써나갈 때 해방은 가까워질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l 단결이라는 실천
맑스와 엥겔스는 ‘선언과 발기문’에서 “정치권력을 전취하는 것”이 “노동자 계급의 커다란 의무”라고 쓰고 있다.(발12) 그러니까, 맑스가 ‘국제노동자협회’를 창립하여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선언하는 이유, 즉, 왜 단결해야 하는가는 ‘정치권력의 전취’를 위해서이기도 한 것이다.
맑스는 노동자들이 그 의무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동시적인 부흥이 보이고 노동자당의 재조직을 위한 동시적인 시도들이 일고 있기 때문”(발12)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맑스는 성공의 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쓰고 있는데 “수(數)”가 그것이다.
맑스는 ‘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그러나 수는, 결합이 그들을 단결시키고 지식이 그들을 지도할 때에만 무게를 지닙니다. 형제적 유대가 서로 다른 나라들의 노동자들을 결합시켜야 하고 또 해방을 위한 그들의 모든 투쟁에서 굳게 함께 있도록 그들을 고무해야 합니다.”(발12)
맑스는 또 하나의 확신이 국제노동자협회를 위한 집회에 혼을 불어넣었다면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이 서로 다른 민족들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발12-13)이라고 쓰고 있다. “노예제도의 영구화와 선전을 위한 대서양 저편의 십자군 원정으로부터 서유럽을 구한 것은 (…) 영국 노동자계급의 영웅적 항거”(발12-13)였다는 것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권력의 전취’라는 ‘의무’,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한 서로 다른 민족들의 협력’, 그 ‘의무와 협력’을 위한 ‘수의 결합’, ‘지식의 전달’, ‘형제적 유대에 의한 만국의 노동자들의 결합’, ‘해방을 위한 그들의 모든 투쟁에 함께하도록 고무’하려는 의식이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에 박차를 가한 것이라고 맑스는 쓰고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다. “생산수단도 생활수단도 없는 무소유의 존재, 노동자”이다.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 부르주아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화폐를 구매할 수 있을 때만 생존이 가능한 사람들이다. 노동자, 농민,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난민 중에도 있고, 아동, 청소년, 청년, 중년, 노년 중에도 있고, 백인, 흑인, 황색인에도 있고, 대기업, 중소기업, 영세 사업자, 정규직, 비정규직, 일용직, 프리랜서, 실업자 중에도 있고 또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은 투쟁의 과정을 통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서로가 서로를 챙기고 보듬고 아끼면서 형성될 것이다. 자신의 일상을 살아내는 가정, 학교, 직장, 지역, 국가, 지구, 그 모두가 현장이며, 정당이나 크고 작은 단체들, 각종 모임을 통해서 현실을 알아가고 사람과 세상을 이루어가는 것도 투쟁이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질 그들의 연결은 여러 국가나 공동체 간의 프롤레타리아 단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심에 ‘국제노동자협회’와 같은 단체가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가 자신의 자본주의 연구의 결과물인 �자본론� 서문(1864)에서 쓰고 있듯이 자본주의의 발전 경향을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그에 따른 파멸을 막고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고 했듯이,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제어하는 한 과정”으로서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듯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은 그 자체가 그들이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세계일 것이다.
각국의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처지에 맞는 방식으로 각자의 투쟁을 하면서도 전 지구적인 단결을 이룬다면 그 세계 자체가 프롤레타리아가 ‘얻어야 할 세계’로 가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가는 운동 중에 있는 과정이자 결과로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ㅣ자율적인 사람들
‘자율적’이라는 말에는 ‘스스로 알아서 행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칸트의 윤리학에서 ‘실천 이성’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기도 합니다. 한데, 중요해 보이는 것은 자율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자율’의 ‘성격’입니다. ‘무엇’을 스스로 알아서 행하는가. ‘자율적으로’ 타인의 자율을 억압하거나 타인의 권리나 이익을 침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칸트적 의미의 자율적인 ‘실천 이성’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인간 이성 자신의 존재 목적에 부합하는 삶을 살 때 자율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이성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든 자신의 자율을 위해서 타인의 자율을 억압하지 않는 ‘민주적 이성’.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평등한 이성’을 스스로 알아서 행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보입니다. 인간이라면 이미 누구나 자율적인 실천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본성을 가진 것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율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존재 목적이라고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타인의 자율을 억압하는 인간 이성은 자율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자율도 타인의 억압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율적으로 타인의 자율을 억압하지 않는 삶을 살 때 서로가 자율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 타인의 자율을 억압하지 못하도록 요청하면서 스스로 타인의 자율을 억압하지 않는 인간 이성이 되는 것이 자율적인 인간 이성이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겠습니다. 그것이 각자 알아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실현하면서,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자율적 존재로 살아가는 길이겠습니다,
자율적인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자율을 살아낸 사람들일 것입니다. 청년, 중년, 노년 중에도 있고,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중에도 있습니다. 저는 그들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자율적인 사람들’에게서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의 가능성을 봅니다.
ㅣ짜임 관계
아도르노에게 '변증법'은 사유의 ‘동일화’에 맞선 ‘비동일성에 대한 철저한 의식’이다. 아도르노는 ‘적합성’(adäquatio)의 원칙에 근거하여 개념과 대상의 일치를 이루어냈다고 믿는 동일성의 가상을 비판한다. 사유가 대상에 적합하다고 믿는 개념은 대상으로부터의 추상일 뿐이기 때문에 그 대상을 완전하게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념으로 완전히 추상될 수 없는 개별자와 특수자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바로 동일화하는 사유를 통해 생겨나고 동시에 밀려난 ‘비동일자’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동일성 철학은 보편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보편성의 추구는 개별자를 배제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 자체가 안고 있는 결함을 해소하기 위해 아도르노가 제시하는 ‘짜임관계(Konstellation)’는 인식자체의 불완전성을 자각하고 자체 내에 안주하지 않는 사유방식이다. 짜임관계만이 내부에서 개념이 잘라내 버린 것, 즉 개념이 될 수는 없지만 또한 그만큼 되고자 원하는 것, 개념 이상의 것을 외부로부터 표현한다는 것이다.
개념들은 인식되어야 할 사물의 주위에 모임으로써 잠재적으로 그 사물의 내적 요소를 규정하며, 또 사유가 필연적으로 자체로부터 배제해 버린 바에 사유로써 도달한다. 이글턴은 아도르노의 ‘짜임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저 하늘에 빛나는 별은 모두 자신만의 고유한 위치에서 자신만의 색과 밝기로 그곳에 존재한다. 그 별들을 하나하나 각각 떨어트려 놓고 볼 때 그것은 무질서한 군성을 이룰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별자리로서 이름을 붙여준다. 별자리 형상으로 우리는 쉽게 찾고자 하는 별을 찾고 방향과 길을 찾을 수 있다. 하나의 별로서 독자적으로 빛나면서도 다른 별들과 함께 별자리를 구성함으로써 의미를 지니는 것, 이것이 바로 개별과 총체가 동시에 강조되는 성좌(Konstellation)의 의미이다. 개념을 폐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념을 사물화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한 근본 작업은 개념을 총체성이란 체계 속에 다시 집어넣는 것이며, 이때의 총체성이란 성좌적 총체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그런 체계나 전체가 될 것이다”
아도르노의 ‘짜임관계’는 사유에 불가피한 동일성을 행하면서도 비동일자를 잘라내지 않을 수 있는 사유, 다시 말해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개별자를 배제하지 않을 수 있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짜임관계’를 통해서 아도르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다. ‘동일성 사유’는 일면적이고 비동일자들에 억압적이기 때문에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비동일자’와 ‘짜임관계’를 통해 대상을 철저히 사유하려는 아도르노의 반성적 태도에 대해 실천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는 사유는 곧 “행동(Verhalten)으로서 실천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ND, 243) 또한 아도르노는 “변화하고자 하는 실천은 이론 없이 변화될 수 없을 것”(ND, 146f)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유도 실천’이라거나 ‘이론 없이 실천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실천”에 기여하지 않기 위해서, 실천에의 관심(Interesse von Praxis)을 위해서 이론이 자신의 독자성을 다시 획득해야 한다(ND, 146f)는 주장이다.
2026.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