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 이념대립의 역사. 친북좌익빨갱이라는 색깔론은 한국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은 중요한 요인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해 보이는 사실은 무엇을 위한 이념이며 색깔론인가에 대한 물음에 한국 정치가 내놓을 답은 정치인들의 기득 권력 유지 이외에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트럼프라는 고유명사로 상징되는 극단적 이익의 시대에, 기후재난으로, 로봇산업의 발전으로, 학살 전쟁으로 인간이 사라져가는 인류의 시간 앞에서 한국 정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해방을 쓰다 보니 그런 의문이 든다. K-민주주의라는 이름 앞에서 다른 인류를 상상할 수 있는 다른 정치는 가능한가는 물음이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아버지의 해방일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분단된 한국 사회의 비극적 어제와 오늘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어제의 비극이 오늘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한국의 희극적 내일을 위해 계속 쓰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아버지가 바랐던 ‘해방’은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평등한 세상’으로 보인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아버지가 ‘해방주체’로서 살았고 살려했던 ‘해방세상’을 통해 우리의 해방주체, 우리의 해방세상을 일으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쓰는 아버지의 딸 아리가 ‘사람이 오죽하먼 글것냐’를 입에 달고 사는 아버지를 받아치며 ‘오죽하먼은 개뿔’이라며 냉소하듯이, “분단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다는데, 젊은 세대가 민족의 통일을 지상 최대의 과제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분개”4) 하는 아버지에게 유물론자로서 현실을 직시하라며 냉소하듯이, 학교를 때려치운 베트남 아이와 담배를 피우며 미제국주의를 물리친 베트남 운운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냉소하듯이, 아리는 냉소하고 또 냉소한다.
그런데, 아리가 냉소하는 대상은 “나에게 나와 같은 존재였”던, “일심동체”였던, “나의 우주”(아버지200)였던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를 빼앗아간 “국가”, “자본주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자본국가권력 및 남북분단 체제 유지와 노동탄압을 위한 이데올로기는 ‘친북좌익빨갱이라는 공안몰이’로, ‘국가보안법’이라는 노동자민중을 탄압하는 정치적 장치로, ‘한·미·일 자본국가권력 동맹’이 야기하는 전쟁위협’으로 오늘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우리의 삶을 빼앗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쓰면서 아리는 아버지를 빼앗아간 세상과는 다른 세상, 아버지가 살려했던 삶 그 자체였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옳은 삶’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를 알게 되었기에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도 함께 쓰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살았고 살려했던 ‘해방주체’로서의 삶이 곧 아리의 삶일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해 보이는 것은 아리도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살기를 바란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리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씀으로써, 또한 모든 아버지의, 모든 사람들의 해방일지를 씀으로써, 자기 방식의 ‘해방주체’로서 자신이 살려는 세상을 살며 만들어가고 있기도 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살려했던 ‘해방주체’로서 아버지의 삶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아버지가 “촘촘한 그물망”과 같은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나 좁고, 돌고 돌아 만난다. 학수는 아이 얼굴을 보고서도 자기가 도움을 준 할머니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 작은 세상에 만들어놓은 촘촘한 그물망이 실재하는 양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났다.”(아버지239) 그것은 ‘자신부터 스스로 평등한 사람이 되는’, ‘평등한 관계를 살아가는’, 그러한 삶일 것이다. 자본주의를 탓하기보다 자본주의를 알아가며 자본주의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몸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해방주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해방주체’ 그 자체가 되는 것이기도 할 테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몸소 평등한 삶을 실천한 ‘평등한 생활의 삶’ 그 자체였던 아버지였기에, “가부장제를 극복한, 소시민성을 극복한, 진정한 혁명가”(아버지245)였기에, 그런 아버지를 따라 ‘해방주체’가 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워 보이지만, 그런 아버지가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던,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아버지249)던,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아버지265)였다는, 즉, 아버지도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위한 ‘해방주체’가 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평등한 세상’은 그런 세상을 살아가려는 우리 모두가 각자 만들어 온 역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 모두에게는 인류사적 ‘해방주체’로서의 ‘유전자’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삶 속에서 불현듯 만나기도 한다. 한 사람을 통해서, 한 사건을 통해서, 한 사랑을 통해서, 한 투쟁을 통해서, 발견하고 발견됨으로써, 씨 뿌리고 꽃 피움으로써 삶과 세상 곳곳에서 만나기도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배경을 이루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의 풍경이 ‘묘하게 평화로운’것이었다는 대목은 삶은 영원하지도, 인간은 완전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묘하게라도 평화로운 것이 전쟁을 겪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만 같아 작은 위안을 주기도 한다. “아버지의 지인들은 우리나라의 보수 진보와는 달리 언성을 높여 성토하는 대신 서로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들 방식대로 아버지를 추도하는 중이었다. 묘하게 평화로웠다.”(아버지212) 아리의 말처럼 “적당히 분주하고 평화로웠”(아버지212)던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어쩌면 죽음으로써야 비로소 가능한 평화일지도 몰랐다.”(아버지212) 인류의 존망이라는 처절한 전쟁터에 내 던져진 것만 같은 오늘의 ‘해방주체’들이지만 ‘해방주체’들이 서로에게 ‘자신들 방식대로’ ‘적당히 분주한’ 삶의 태도를 존중해 주는 것은 ‘해방주체’들이 ‘평등하게’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이자 ‘여유’로 보인다.
ㅣ그들이 가장 빛났던 순간
소설을 읽는 묘미는 여럿 있지만 나에게는 단연 등장인물이다. 주연과 조연이 나뉘어 있지만 어느 하나가 없으면 소설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그들 모두가 주인공이다. 주연보다 더 돋보이는 조연도 있다. 주연과 조연을 떠나 나의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어서 공감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소설 [태백산맥]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 모두 주인공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연을 꼽자면 염상진이나 김범우, 하대치를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태백산맥’을 만난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에 남아 문득문득 나타나는 인물은 그들이 아니다. 심재모, 염상구, 정하섭과 소화는 소설에서 조연이지만 내 머리가 기억하는 주연이다.
한국군 장교 심재모는 벌교의 계엄군 사령관이다. 인간을 ‘좌左’와 ‘우右’로 나누어야 한다면 그는 ‘우’다. 하지만, 그는 ‘우’에 고정된 인물이 아니라 좌와 우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무의식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우’였다가 ‘좌’와 ‘우’가 나뉘게 된 ‘현실’을 ‘인식’하면서 고뇌한다. 심재모가 문득문득 내 머릿속에 나타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인식의 변화’를 겪으며 괴로워하고 고뇌한다. 변화의 순간.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고통을 통한 변화의 시작은 ‘현실 인식’이다. 물론, 인식 이전에 충격적인 사건이나 새로운 환경에 따른 경험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행동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모든 인식이 그렇듯 그의 ‘현실 인식’ 역시 자생적이지 않다. 그의 잔잔한 의식에 야학을 하던 서민영 선생이 돌을 던진다. ‘가난한 사람들은 강자가 약자들을 희생시켜서 생존하는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그가 ‘좌’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인간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완장’으로 기억되는 염상구. 형인 염상진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로 그는 삐뚤어졌다. 인간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야 한다면 그는 ‘악’이다. 태초에 악이었는지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의 관심은 그의 삐뚤어짐이다. 그의 삐뚤어진 모습은 아니더라도 형과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라는 그가 삐뚤어진 이유는 친숙하다.
그가 완장을 차고 극우의 이름으로 저지른 악행들은 빼고. 장남에 대한 편애로 차남들이 인정투쟁을 벌이는 차남들의 가족사. 장남은 장남이라서 차남은 차남이라서 아버지는 아버지라서 어머니는 어머니라서 힘든 가족구조가 야기한 사회사. 장-차남이 흔치 않은 오늘날의 저출생 시대에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 가족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힘든 가족사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사회 현실이다.
편애로 삐뚤어진 염상구들의 사회사는 ‘태백산맥’을 넘어 세계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그런 삐뚤어짐을 세계사의 야만, 파시즘의 작동기제로 설명한다. 라이히는 파시즘을 ‘평범한 인간의 성격구조가 조직화되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설명한다. 라이히는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사회에서 ‘성격무장’을 통해 ‘자유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권위에 기댐으로써 파시즘과 같은 독재가 가능해진다고 설명한다.
그들 말하지 못해 억눌렸던 목소리들이 분별 있게 표출되었다면 좋았으련만 인정받기 위한 그들의 행위가 타자에 대한 몰인정이라는 폭력을 야기함으로써 모두의 불행을 초래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어떤’ 권위에 기댈 것인지 분별하지 못해 일어난 무분별한 행동은 그들의 잘못이지만 형식적이고 배타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애초에 그들이 온전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마련해 주는 것은 ‘건강한 권위들’의 몫이리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접하게 되는 전 세계 극우파시스트들의 소식은 마음을 착잡하게 한다. ‘완장’을 떠올리게 하는 ‘태극기 부대’, 유색인종,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다른 사람의 좋은 에너지를 빼앗는 ‘뱀파이어’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은 그들의 ‘악행’이 사회구조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인식의 변화를 겪어 그들의 ‘악’이 아니라 ‘평범함’이 빛나는 순간을 만나기를 바라본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공산주의자가 된 정하섭은 [태백산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나에게 기록해 주었다. 심재모가 인식의 변화를 겪는 고통의 과정을 통해 빛났다면, 염상구가 평범함에서 악함이 되는 과정을 통해 빛났다면, 정하섭은 공산주의자로서의 삶과 소화와의 사랑, 그로 인해 소화가 겪는 변화의 과정을 통해 빛났다.
물질적 부를 쌓기 위해 어떤 야비한 짓도 서슴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대립을 넘어 공산주의자라는 삶을 사는 정하섭의 모습은 안타깝게 빛났다. 아버지와 대립하게 된 것은 안타까웠지만 공산주의자로서의 그의 삶은 빛났다. 그리고 무당의 딸 소화와의 ‘사랑’이 소화를 변화시켰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그의 삶과 사랑이 소화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언젠가 염상구가 극우가 된 것이, 정하섭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이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일까라는, 그들의 삶을 결정지은 중대한 뿌리는 아버지였을까라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그 의문은 인간의 행위를 결정짓는 것은 ‘사람’일까라는 의문을 낳았다. 사람에 대한 ‘반감’은 그에 반하는 행위를 하게 하고, 사람에 대한 ‘호감’은 그를 닮고 싶게 한다. 그 ‘반감’과 ‘호감’을 결정짓는 것은 염상구의 경우처럼 인정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정하섭의 경우처럼 가치관의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그 사람이 아버지라면 영향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버지 중심 사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 중심 사회라면 어머니의 영향이 클 것이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인식이 형성되더라도 심재모와 같이 서민영이라는 ‘사람’에 의해 인식의 변화를 겪기도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인식의 형성과 변화는 ‘사람이라는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결론이었다.
언젠가는 정하섭이 사랑한 것이 공산주의였는지 소화였는지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정하섭이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 이전에 알고 있던 소화에게 다가간 것이어서 품었던 의문일 것이다. 그 의문은 ‘이념이 우선인가, 사람이 우선인가’라는 의문을 낳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어릴 적부터 정하섭을 흠모하던 소화가 공산주의자가 된 정하섭과 사랑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인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정하섭을 위해 헌신하며 지주를 위한 무당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으려는 소화의 모습에서 값진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하섭과 소화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신의 삶을 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이타적이다.(리처드 도킨슨, ‘이기적 유전자’ 참고)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만 변한다. 동의할 수 있는 말들이다. 그들의 말에서 중요한 것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인간도 이타적일 수 있다는 사실, 쉽게 변하진 않지만 사람도 변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얼마든지 더 이기적인 방향으로도 더 이타적인 방향으로도 변할 수 있는 것이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사람인 것이다.
‘현실 인식’을 통해 작지만 큰 변화를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 세상 모두가 외면하더라도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게 빛난다. 그렇다고 보는 것이 나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감성과 관점이다. 이기적인 과학에도 불구하고 이타적인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만물은 변하기 때문일 것이며, 이기적인 과학의 도움으로 인간은 이타적인 방향으로 인류를 확장해 갈 줄 아는 지혜를 가진 동물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기적 이타주의자’, ‘이타적이기 위해 이기적인 인간’. 언제부터인가 나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고 그렇게 규정되려 한다. 모순적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지금, 여기’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한 나의 운명전략이다. 외로울 수 있고 고독할 수 있지만 나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자유롭다. 그럼에도 세상 모두와 함께하고 싶은 것 또한 나의 이기적인 본성의 발로이리라.
ㅣ자기로부터
영화 <디 벨레>(Die Welle, The wave, 독일, 2008)의 데니스 간젤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묻는다. 아직도 독일에서 독재정치가 가능할까? 독일에서 더 이상 독재자가 안 나올까?
독일의 고등학교 교사인 뱅어는 학교에서 한 주 동안 진행하는 프로젝트 주간 수업으로 ‘무정부주의’라는 주제를 맡고 싶었으나 ‘독재정치’라는 주제로 수업을 하게 된다. 맡고 싶지 않았던 주제. 하고 싶지 않은 주제이기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한 개인이나 집단이 대중을 지배하는 것. 자기 지배(Autokratia)를 의미하는 독재는 한 개인 또는 정부를 구성하는 한 집단이 많은 권력을 취해서 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도록 되어 있지. 나치독일은 끔찍했지. 충분히 알아먹었다고. 지랄 같은 나치, 그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럼, 네오나치는? 우리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언제까지 죄책감 느껴야 해? 죄책감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거야.
몇몇 학생들의 진지함은 대다수 학생들의 무관심과 침묵에 묻힌다. 독재가 나와 무슨 상관이람?! 독일에서 독재자는 더 이상 안 나올까? 더 이상 독재정치는 가능하지 않을까? 당연히 더 이상 독재는, 독재자는 없을 것이라는 학생들의 대답과 함께 뱅어의 '독재정치'는 시작된다.
뱅어는 학생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대표자(뱅어)를 뽑고, 대표자에 대한 존경을 표할 것과 규율과 통제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 공동체의 이름을 '디 벨레'(물결)라 짓고, 흰색 상의로 복장을 통일하고, 로고와 홈페이지도 만들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처음보다 두 배 이상 불어난 학생들, 아니 '디 벨레'의 멤버들은 강당에 모인다. 일주일 동안의 공동체 경험을 통해서 그들은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뱅어는 여전히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디 벨레'가 끝났음을 알린다.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고 무엇보다 '독재정치'를 학생들 스스로가 구현했기 때문에 수업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즉, 학생들의 행복경험이 '디 벨레'의 멤버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공동체로부터 배제함으로써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더 나아가 그들과 생각이 다른 학생을 배신자로 몰아 처벌을 하려 했고, '디 벨레'의 대표자인 뱅어가 시킨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디 벨레'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하고 자살하는 일까지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공동체 '디 벨레'를 지키려고 한다. '우리가 실수를 했지만 바로잡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뱅어는 그런 학생들의 생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런 건 바로 잡을 수 있는 게 아냐.'
공동체를 이루면 구성원들 누구나 자신(들)과 다름에 대한 배제와 규율(법)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과 살인, 지배 권력에 대한 자기 동일시로 행하는 ‘독재정치’를 할 것이라는 감독의 입장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그가 지향하는 듯 보이는 ‘무정부주의’는 다를지 의문이다.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들을 끊임없이 바로 잡아가며 더 나은 방향으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인류는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 방향이 무정부의 상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가 지향하는 더 나은 방향이 어떤 곳이든 그곳으로 가는 길 역시 ‘지금, 여기’의 독재정치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떤 독재정치를 선택할 것인가. 독재정치는 자기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다. 자기 선택에 달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름에 대한 배제나 폭력, 지배 권력과의 자기 동일시를 통해 독재정치를 누리는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 각자의 자기 독재가 배제와 폭력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다름과 갈등하거나 협력하며 독재정치의 성격을 바꾸어 가는 존중을 선택할 것인가.
자기 독재자들의 독재정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삶은 존중받겠다면 존중해야 하는, 배제하겠다면 배제당하는 삶이기도 하다. 존중과 배제, 어떤 독재정치를 선택할 것인가. 공동체의 삶은 존중과 배제 사이의 끝없는 자기 선택의 과정일 것이다.
2026.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