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23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해방과 사랑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사랑은 ‘희생’, ‘욕구’를 떠올려 준다. 해방을 위해서 ‘희생’이, ‘욕구’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해방을 위한 희생 없이, 해방에 대한 욕구 없이 해방은 가능한가. 사랑은 ‘소유’를 떠올려 준다. 소유에 대한 욕구의 희생 없이 사랑은 가능한가. 해방은 가능한가. 그렇게 해방과 사랑은 만난다. 해방을 쓴다는 것이 민주적이고 평등한 소유관계를 쓰는 것이기도 하다면, 해방은 사랑을 쓰는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해방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사랑하여 아름다운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작가가 아내에게 바치는 글이기도 하지만 ‘역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당신을 위해’ 쓴 글이기도 하다. 작가는 소설을 읽는 당신에게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거라고, 사랑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거라고’,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윤택한 삶을 위한 일과 결혼이라는 영리 활동을 하면서도 사랑을 하는 기분, 사랑을 받는 기분... 같은 걸 느끼고도 싶은 거’라고 말한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이 서로를 사랑하는 한은 인간은 끝까지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동물’이라고, 그래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사랑이야말로 자기 삶의 권력, 자신의 삶을 살게 하는 강력한 동력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권력은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함으로써 대중을 지배하려 든다. 권력은 대중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아름다워지라고 유혹한다. 순수의 이름으로, 욕망의 이름으로, 희생의 이름으로, 그리하여 아름답게 권력을 사랑하는 주인이 되라며 유혹한다. 권력의 사랑과 아름다움 앞에서 대중들은 현혹되기 십상이다. 한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 그 사회의 지배권력이기 때문이다. 지배 권력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것은 미움받아 마땅한 추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지배적인 욕망을 인식하고 거부하는 일이기에, 그리하여 동시에 자신을 거부하는 일이기에, 그만큼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욕망을 꽃피우는 일이기에. 그 자체가 아름다운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해야 한다면, 아름다워야 한다면 소설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지,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물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만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진리를 말하자면 늘 비非진리에 대해서도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진리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사랑에 대한 여러 진리들에 공감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 사랑이 아니면 사랑도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오해가 사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이 오해인지 아닌지는 끝내 알 수 없다. 그 오해가 사랑을 불러 사랑을 이룬다면 그것은 오해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면? 사랑이라고 오해했을 뿐인 것이다. 그뿐이다. 중요한 것은 오해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고, 확인할 필요도 없는 오해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를 통해 사랑을 이루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로에 대한 높고 깊은 이해가 사랑을 이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오해했든 이해했든 오직 너라서 사랑한다는 자기 확신을 갖고 돌진(?)할 때 사랑을 쟁취할 가능성이 높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작가는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오해로 이룬 스무 살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엄마는 자신이 사랑했을 아이의 사랑을 지켜주지 못했다. 사회가 지켜주지 못한 사랑을 엄마라고 지켜줄 방도가 없었다. 엄마 역시 그 사회의 사랑받지 못한 일부일 뿐이었다. 여자는 그 사회를 떠남으로써 스스로 사랑을 지킨다. 작가는 스스로 서로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자기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남의 얼굴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남의 아름다운 얼굴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상상해 주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삶을 긍정해 주는 긍정의 생명력을 서로에게 불어넣어 주는 것, 사랑이리라. 그처럼 삶을 긍정해 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들은 아름답다. 그리하여 작가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여 아름다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ㅣ그대를 잃은 날부터


소설 <그대를 잃은 날부터>는 현실에 근거한 현실 너머의 상상이다. 과거의 역사는 상상될 수 없는 것이지만 미래의 역사는 얼마든지 상상될 수 있다. 물론 그 상상이 현실이 될지 상상에 그칠지는 다른 문제이겠다. 다만 과거와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상상할 때 상상의 실현 가능성은 커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최인석의 이야기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재 ‘그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다른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서진으로 대표되는 ‘그대’는 ‘사적 소유라는 욕망’의 괴물에게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괴물들이다.

준성 역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괴물이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서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 또한 괴물과 닮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사적 소유라는 욕망’의 괴물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차이는 있다.

“인간이 모두 괴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마술에 걸렸다는 것을 인정하고서 타인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해. 자신이 괴물이고 저쪽은 인간일 수 있다, 하는 태도로. 누가 우리를 이 마술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이야기 속에서는 누이가 쐐기풀로 외투를 열두 벌 만들면, 왕자가 나타나 공주에게 키스를 하면 마술에서 벗어난다고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이 악착같은 마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까? 누가 마술에서 풀어 주냐고 물었지? 아직도 모르겠냐? 괴물이 괴물을 마술에서 풀어 주는 거야. 당연하지. 왜? 우리가 다 괴물이거든. 괴물과 괴물이 만나면 서로가 서로를 마술에서 풀어줘야 하는 거야. 싸우고 죽일 게 아니라. 인간은 모두 괴물이니까.”(그대, 107)

타자 혹은 다름, 객체 혹은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중과 인정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존중과 인정을 모르는 폭력마저 존중하고 인정하라는 말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소설에서 ‘인정’의 의미는 조금 달라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 무한경쟁의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하기에 ‘더 잘 팔리는, 더 잘 소비하는’ ‘상품’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다 승자가 되든 패자가 되든 자신도 삶도 그대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

최인석은 그러한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괴물’이라고 불렀고 그 있는 그대로의 괴물과 같은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서로를 괴물이라는 마술에서 풀어 주는 일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고마워요. 준성 씨.’ 그녀가 말했다. 미안하다고, 준성은 다시 말했다.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당신이 나에게 준 게 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런 걸 받아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이 준성은 고마웠다. 그저 진이를 좋아한 것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서진은 애써 참았다.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난 알아. 날 좋아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준성의 가슴을 쳤다.”(그대, 315)

준성이 반짝 빛나게 했던 서진의 눈물을 통해서 그녀가 ‘처음으로’ 그 누군가에 의해 ‘한낱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그녀’라는 이유로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준성의 행위가 서진의 삶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준성은 서진을 괴물로부터 지켜주려 하고, 서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려 하고, 사람들이 누구나 원한다고 믿고 있는 것, 행복, 즐거움, 자신감, 안정감, 편안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려 한다.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목숨까지 걸지만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이 늘 존재한다는 것은 앞다투어 먼저 인정하고 사랑하지 않는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인정받고 사랑받겠다는 생각 이전에 인정하고 사랑하겠다는 생각을 경쟁적으로 하게 되면 인정과 사랑이 넘쳐 너나없이 인정받고 사랑받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쉽다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라는 물음은 먼저 인정하고 사랑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쯤이면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지겠지만 말이다.

인정과 사랑의 어려움을 자본 권력이 야기한 사적 소유라는 감각의 문제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인정과 사랑의 문제도 자본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기득권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 덕분에 그들에 비해 더 많은 기득권을 누리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을 ‘사회화’하려 하지 않는 한 구성원들이 서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회는 요원해 보이는 것이다.

소설에서 ‘인정’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그대를 빼앗아 가는 자본 권력이라는 괴물에 의해 그와 비슷한 괴물이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기도 하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자본이라는 괴물로부터 그와 비슷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그대’를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ㅣ지독한 믿음


<그 해 우리는>의 웅이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연수와의 이별의 순간을 교통사고에 비유하자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초대형 사고에 해당할 것이다. 이유조차 알 수 없는 교통사고, “내가 가진 것 중에 버릴 게 너밖에 없다”던 연수의 ‘독한 이유’를 알아차릴 새도 없이 버림받은 웅이가, 연수로 인해 인생 포기한 폐인처럼 살던 웅이가, 5년이나 지나 드라마처럼 유명 작가가 되어 다시 연수를 만나, 두 번은 없을 것 같던 사랑을 하고 마침내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작가의 ‘소망’ 드라마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의 연애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을 수 있다’ 던 드라마 속 피디의 말처럼, 위대한 작가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 드라마에 전형적인 현실을 담을 수 있을지언정 그보다 더 전형적인 현실은 여전히 현실 속에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현실은 하나가 아니니까 말이다.

현실적인 것만도 소망적인 것만도 아닌 현실적인 소망, 현실에 근거한 소망이 담겨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단지 작가만의 소망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일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헤겔)이라는 말을 ‘현실적인 것이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순간이다.

현실 속의 작가이기에 현실이 작가를 만드는 것이지만, 현실 속의 작가이기에 작가가 현실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실은 인간들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간절한 소망이 함께 한다면 바라는 현실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연수와 웅이가 상처로 인해 사람에 대한,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되어준 연수 할머니, 웅이 양부모와 같은 사람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가난으로 상처받은, 버림받아 상처받은 연수와 웅이의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가진 상처로 인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믿음이 두 사람의 사랑을 다시 꽃 피워준 것이라고 믿게 된다.

연수 할머니와 웅이의 양부모가 그들을 낳은 친부모가 아니라는 점에서 할머니와 양부모가 보여주는 믿음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들이 보여준 믿음이 ‘사회적인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즉, 사회에 그런 믿음이 있다는 것은 가난의 상처, 버림받은 상처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에 절망할 수밖에 없음에도 소망하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믿음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하기에 자신보다 더 삶을 소망하게 하는 사회와 그런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이루는 믿음이 무너지면 사회도 사람도 자신도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과 버려짐’으로 무너져 가는, 파괴와 분열로 파멸해 가는 인류의 시간 속에서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은 한 줄기 빛과도 같다.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믿음의 빛이 발하고 있다는 것은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현실에 대한 총체적 인식에 근거한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밝혀주는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일 테다. 그들의 지독한 믿음으로 인해 견고할 리 없는 세상은 견뎌지고 있는 것일 테다.




2026. 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