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24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생산수단의 소유방식이나 국가권력, 정치 권력의 민주화가 해방의 충분조건이라고 한다면, 충분한 조건이라는 것은 충분해지기까지 필요한 조건들을 채워야 하는 것이라면 충분조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필요조건은 무엇이든 다 필요한 조건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은가 묻는다. 그 많은 개별들의 필요들이 충족될 때 해방의 충분조건이 갖춰지기 때문에 그 모두가 필요한 조건이라기 보다는 충분조건을 갖추려는 이유가 모두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함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겠다. 필요 충분 조건이 있는 것이다.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 각자의 자리에서 해방을 위해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것도 해방의 필요 충분 조건일 수 있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법의 쓸모


만인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법法 앞에서라도 법으로라도 평등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법의 존립 근거일 것이다. 법으로 도덕이나 사회 질서를 바로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이들이 바라는 도덕이나 질서로 바로잡힐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법의 쓸모를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면 ‘모종의 질서’를 위한 규율은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함으로써, 만인을 평등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서 쓸모가 있을 뿐이다. 쓸모를 다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다 버릴 것은 아니다. ‘모종의 질서’를 위해 불가피한 규율로서 법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도 만인이 평등한 ‘모종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불가피한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ㅣ나무처럼


영화 <유리정원 Glass Garden>의 재연과 지훈. 그들은 순수해 보인다. 그들이 순수해 보인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렇다. 지훈은 무명작가인데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에게 표절문제를 제기한다. 표절로 거장의 반열에까지 오른 것을 알면서도 그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거장을 건드린 것이다. 거장이라는 분이 먼저 지훈의 자존심을 건드리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지훈처럼 행동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훈은 순수해 보였다. 잘못된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지훈은 표절은 안 했고 안 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재연은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는 과학도인데 후배에게 자신의 연구아이템을 도둑 맞고 사랑했던 사람마저 빼앗긴다. 재연이 발표한 아이템에 대해 발표회장 참석자들은 필요한 연구이지만 1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모른다며 외면한다. 그녀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믿었던 사랑했던 정교수마저도. 아이템 발표회장 참석자들은 훔친 아이템으로 좀 더 실용적인 연구아이템을 내놓은 후배에게 관심을 갖는다. 재연은 100년이 걸리더라도 필요한 연구라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순수해 보였다. 실용적인 아이템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당장에 필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해야 할 필요한 연구를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지훈과 재연. 그들이 지키려던 순수라는 가치는 소중해 보인다. 지키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것 때문에 더 소중해 보이는 것이다. 순수의 소중함을 모를 리 없을 테지만 순수를 포기하는 이들이 늘어가는 이유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훌륭한 작품을 쓴다거나 대단한 연구에 성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살기 위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거장을 건드린 대가로 지훈의 책들이 수거되고 있다는 출판사 사장의 투덜거림이나 영업사원이 되어버렸다는 정교수의 말처럼 순수는 생존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어버린 것이다. 예술적인 작품을 쓰는 것보다 표절 거장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인류발전에 기여하는 연구보다 돈 되는 프로젝트를 훔쳐내는 것이 생존에 더 유리한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순수는 더 이상 지켜서는 안 될 바보 같은 일이 되어버렸다면, 살아남기 위해 아니 살아남는 것과 관계없이 본래 그런 것이었든 어쨌든, 이제 순수가 그런 것이라면 소수의 순수한 이들이 사회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면, 그들이 다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순수한 이들은 사회 부적응자나 광인이나 병든 자로 살다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면 순수의 의미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한 건 오염되기 쉽죠.” 재연의 말처럼 아직 오염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순수했던 이들은 오염되어 버렸다. 순수했기에 오염되기 쉬웠던 것이다. 지훈도 마찬가지다. 순수했기에 그 바닥에서 쫓겨나고 여자 친구로부터 버려졌다. 순수해서 상처받다 보면 살아남기 위해 순수를 버리게 된다. 지훈도 자신의 욕망에 재연을 가둬버린다. 그도 유명작가가 되어 살아남겠다는 욕망에 갇혀 순수한 재연을 이용했을 뿐 재연을 지켜주지 못했다. 뒤늦게 잘못했다고 다시 쓰겠다고 재연을 붙들고 울어보지만 이미 그녀의 순수는 오염되어 버렸다. 오염된 순수를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을 재연은 연구를 통해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재연과 같은 순수를 지키려는 이들이 살아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나무들은 가지를 뻗을 때 서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다른 방향으로 자라나지만 사람은 안 그래요.” 나무에서 태어난 재연은 다시 나무가 되었다. 재연처럼 순수하게 살다 나무가 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나무처럼 살아갈 수는 있을 것이다.


ㅣ언니


‘언니’라는 말은 자매 사이에서 쓰는 말이니 남자인 내가 ‘언니’라는 말을 쓸 일도 들을 일도 없다. 그런데, 쓴 적이 있다. 오래전 산악부에서 여자 선배들을 남자 후배들이 ‘언니’라고 불렀다. 그때 쓴 ‘언니’의 어원에 대해서는 잊어버렸지만 그랬다.

언젠가 가끔씩 들은 적도 있다. ‘언제나 니 편’이라는 말의 줄임말로 나에게 그렇게 말하던 분들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늘, 영원히’ 이런 부사를 잘 쓰지 않는 편이다. 문학적인 글보다 논문 같은 학술적인 글을 오래 쓰다 보니 그런 언어 습관이 몸에 밴 것일게다.

‘난 언제나 니 편이야’ 이 듣기 좋은 말에 대해 안 좋은 경험을 한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나 니 편’이라는 말은 언제나 자기 편이 되어달라는 말이기도 하더라. 거기까진 좋은데 ‘언제나 니 편’이라고 해놓고 자기 편이 안 되어주면 배신자로 낙인찍으려 드는 사람들을 경험하면서 ‘언제나’라는 부사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기도 했다.

살다 보니 상황에 따라 ‘언제나, 늘, 영원히’ 같은 말이 필요할 때가, 그럴 리 없음에도 진실일 때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그래서 적절한 타이밍에 그런 말을 쓰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 부사들이 기꺼이 써지지는 않는다.

나는 편 가르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나는 언제나 니 편이 아니라 나는 언제나 내 편이다. 필요에 따라 니 편이 되어줄 수 있을 뿐이다. 영원히 니 편이 되어주고 싶을 때가 있긴 하다.

그렇게 말할 때도 있지만 지금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고 그 말을 지키려고 하겠지만 나중에는 니 편이 아닐 수도 있다. 언제나 니 편이길 바란다면 언제나 니 편이 되도록 노력하면 된다. 나는 언제나 내 편이다.




2026.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