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해방을 쓴다는 것은 현재의 지구를 특징 짓는 자본주의가 최고에 이른 상태인 제국주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앎의 노력 가운데에는 칼 맑스의 <자본론>을 읽어내려는 것도 있겠다. <자본론>과 같은 고전들은 한번 읽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러번 읽을 필요도 있겠고 읽는 행위에 매몰되어 실증적인 분석에 머물러서도 안 될 것이다. '현재'라는 기준에 비추어 부단히 분석하고 해석하고 상상하여 남다른 현재의 가능성을 종합해 내는 과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론과 제국주의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도 참고하면서 정치경제, 사회문화, 역사적인 현상들도 참고하면서 <자본론>에 기반하여 현실을 새롭게 써나가는 과정도 필요하겠다. 그 역시 해방을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해방을 쓰는 것이 애초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현실의 변화를 따라잡으며 바라는 현실을 쓰는 일은, 그리하여 해방을 쓰는 일은 어렵지만 도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물론,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도 다르고, 해방의 의미도 다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해방을 위해선 부지런히 해방을 써나가야하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제국주의 시대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단계”라고 규정한다.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한 단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고정적이며 영속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를 넘어 어떻게 발전해 갈 것인가. 그것은 자본주의의 발전 법칙에 따른 것이기도 하겠지만,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주체들의 운동 법칙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운동’이 그래왔듯이 자본주의 발전이 야기해 온 경제위기, 기후위기, 전쟁위기를 넘어서는 사회로 발전의 방향을 이끄는 데에는 ‘운동’이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운동의 시작은 오늘날의 상태이며 현존하는 전제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 단계인 제국주의 시대가 어떠한지 살피는 것이겠다.
레닌은『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제국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만약 제국주의를 아주 간명하게 정의해야 한다면, 우리는 제국주의를 독점 단계의 자본주의라고 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독점 단계’는 소수의 선진국에서 발전되었다. 그곳에서 소수의 거대기업은 경쟁자들을 차차 제거한 후 은행과 합병을 통해 거대 트러스트를 설립한다. 국내 시장을 장악한 후, 그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국내에서 정부 계약 우선권을 얻기 위한 자원과 관계망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 도로·항만·철도·군사기지 건설 투자 기회를 얻기 위한 관계망을 구축한다. 국내외에서의 인수합병은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과 같은 자본축적 효과를 낳으며, 이 경향은 점차 강화되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몇몇 강대국들의 자원·경제력 집중은 오늘날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회주의와 전쟁』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자본주의는 산업 전 분야를 신디케이트와 트러스트와 자본가 백만장자 연합이 장악하기에 이를 정도로 자본 집적을 발전시켰으며, 식민지의 형태로나 수천 갈래의 금융적 착취로 타국을 얽어매는 것을 통해 거의 세계 전체를 ‘자본의 영주들’간에 완전히 분할해놓았다. 자유무역과 경쟁은 독점을 향한 쟁투로, 자본 투자와 원료 획득 등을 위한 영토 쟁탈전으로 대체되었다.”
“인류가 사회주의로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식민지와 독점과 특권을 통해, 그리고 모든 종류의 민족 억압을 통해 자본주의의 인위적 보존을 꾀하는 ‘강대’국들 간의 수년, 심지어 수십 년간의 무장투쟁의 고통을 겪을 것인가 하는 선택에 직면할 정도로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발전시켜놓았다.”
ㅣ'제국적 생활양식' 너머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즉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선404)
맑스와 엥겔스의 ‘선언’의 문장처럼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 및 국가권력의 사유화’에 기반하여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해 왔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약소국들의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하고 착취하여 이주노동자와 난민을 양산하고, 무분별한 생산력 증대와 과학기술의 오용에 따른 실업, 기후 및 바이러스 재앙, 핵전쟁, 양극화 심화, 지구 멸망을 대비해 자신들만 살아남겠다는 ‘가장 부유한 자들의 생존’을 위한 세계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지가 창조한 “제국적 생활양식”이 인류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 프롤레타리아가 얻어야 할 세계를 위한 투쟁들은 러시아,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등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다. 그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기에 머물러 있는 그들 국가들이 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말이다.
현실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아서 늘 가변적이다. 그 변화에는 프롤레타리아의 행위들도 작용 한다. 한 사회가 자본주의냐, 제국주의냐, 사회주의냐는 것도 가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변화 의 역동성에 주목하거나, 자본주의 붕괴가 인류의 붕괴가 아니라 오히려 풍요롭고 평등한 세계로 향하도록 그 방향을 견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회’냐가 문제로 보이는 것이다.
쿠바 사회 역시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정체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혼합 계획 경제’) 그렇다 하더라도, 1959년 혁명(혁명의 성격이 무엇이든) 이후, 전 지구화한 자본독재의 질서 아래에서 보여 온 그들 방식의 사회를 지켜내려 분투해온 측면이 이목을 끈다. 그 분투의 과정이자 결과의 중심에 ‘제국적 생활양식’ 너머의 ‘지속 가능성’이 있다.
혁명 이후 수십 년간 일관되게 지켜 온 ‘복지(의료, 교육의 무상화)’와 중앙과 상호 작용하는 ‘이웃 공동체’, 상호 ‘호혜성’에 기반한 ‘국제연대’와 관련한 것이다. 전 지구적인 자본독재 아래에서 그들의 미래 역시 단정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이 분투의 과정에서 보여 준 ‘생활양식’ 자체가 ‘인터내셔널’해 보인다는 것이다.
게바라가 실현하고자 했던 사회는 단순히 경제 체제의 변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부와 소득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인간이 소외에서 벗어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새로운 인간hombre nuevo’으로 변화해야 하는데, 그 변화는 의식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하고 의식의 변화를 위해서는 자발적 노동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게바라는 교육이란 “자기 발전의 수단이고, 나아가 사회 발전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매일같이 엄수해야 하는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게바라는 새로운 사회는 거대한 인민의 잠재력의 개발 이외에는 기댈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마르크스가 새로운 사회는 ‘개인들의 최대한의 발달’을 목표로 하는 사회, 또는 ‘각인의 자유로운 발달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달의 조건이 되는 사회’라고 이야기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바라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이행기로서의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정량적 목표quantitative tasks라고 할 수 있는 생산력 발전만큼이나 공산주의 사회에 필요한 인간 의식 및 사회관계를 정착하는 정성적 목표qualitative tasks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혁경36)이다.
그는 “우리는 빈곤과 싸우지만 소외와도 싸운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사실과 이것이 의식에 반영되는 것, 즉 ‘의식의 사실fact of consciousness’ 모두에 관심을 가졌다. 만약 공산주의가 ‘의식의 사실’을 간과한다면 분배 방법으로서는 작동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혁명적 도덕 가치는 내세우지 못할 것”(혁경36)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혁명 과정을 통해 쿠바인들은 자신들을 변화시켜나갈 것이고, 이것이 또한 그들이 만들어놓은 각종 제도들과 사회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혁경36-37)이라고 주장한다.
게바라가 주장하는 “생산성과 의식의 동시 고양”이라는 과제는 ‘자본주의 생산방식’, ‘제국적 생활양식’과는 다른 사회를 일구어온 쿠바 사회의 것이기도 했지만/하지만, ‘생산성 증대’의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너머를 염두 한다면 전 지구가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고 여긴다. 쿠바 일국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의 문제라는 것이다.
쿠바 사회만 아니라 불균등 발전으로 인해 각국이 처한 프롤레타리아의 처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발기문’에서 맑스가 쓰고 있듯이, 제 민족의 결합을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한 ‘임무’라고 명시한 것은 ‘자본독재’는 전 지구적이라는 것 때문일 테고, 오늘날의 상황은 ‘자본독재’가 ‘끄트머리’에 와 있어서인지 ‘제국주의’의 문제(다극화 가능성)까지 더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인 단결’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과 ‘제국적 생활양식’ 너머를 살아내는 것은 절실해 보이기도 한다.
각국의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부터 넘어서려는 게 맞을 것이고, ‘자본주의 생산방식’,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겠다면 ‘지금, 여기’에서부터 그와 다르게 살아가려 해야 할 것이다. ‘과정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이행기’라는 과정을 건너뛸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생산양식을 전환한다고 해도 새로운 생산양식이 정착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쿠바야 말로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여긴다. 말 그대로 그 과정에서 ‘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요시다 타로는 다음의 이유에서 쿠바의 교훈은 세계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생태학적으로 본다면 지구는 경제봉쇄에 처한 쿠바보다도 닫힌 체계closed system이다. 이용 가능한 에너지도 한정되어 물질 자원은 유한하다. 에너지와 물질 자원의 한계에 직면한 때에 쿠바는 기초적인 사회복지를 무시하지 않고 지속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대담한 정책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묻는다. “우리는 앞으로 쿠바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쿠바가 오랜 시간 분투하며 일구고 지켜온 “신뢰, 연대성, 호혜성에 기반한 사회적 자본”으로서 ‘사람⋅자연⋅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지속 가능성’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생산’을 지속시켜 줄 물적 토대로서 ‘자연’. 제도적 ‘비효율’을 지속적으로 제고할 만한 ‘사람’,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갈 삶의 양태로서 ‘문화’가 쿠바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위기와 재해 위기를 ‘의식혁명’ 및 ‘에너지 혁명’, ‘방재(防災)연습’으로, 주민 참여를 통해 이웃과의 사회관계 자본을 쌓고 복원력을 키우는 방식으로 지속 가능성을 높여 온 것이다.
사이토는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탈성장 코뮤니즘’ 구상에 대해 “핵심은 경제 성장을 감속하는 만큼 탈성장 코뮤니즘이 지속 가능한 경제로 전환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또한 감속은 가속밖에 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천적이다.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서는 자연의 순환과 속도를 맞출 생산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가속주의accelerationism'가 아닌 ’감속주의deaccelerationism'야말로 혁명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이토의 주장대로 ‘탈성장 코뮤니즘’을 실현하겠다면, ‘계획적으로’ ‘감속’을 하겠다면, ‘무분별한 생산’을 억제하겠다면, ‘물질대사에 적합한 생산’을 위해 과학기술을 이용하겠다면, 다시, ‘생산수단의 소유 방식’과 그를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권력의 전취’라는 맑스가 말한 ‘의무’를 상기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사이토의 주장이 생산력이 성숙한 나라들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묻게 한다. 저성장⋅저개발 국가들의 경우에는 감속이 문제가 아니라, 제국들의 수탈과 착취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더 우선적인 문제로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미래상이라도 그려볼 시발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저개발 국가들의 경우는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과학적 사회주의’나 ‘탈성장 코뮤니즘’의 전략을 취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국제노동자협회’와 함께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제 민족의 결합’, 그리고 그들 모두의 연결과 상호작용, 그런 가운데 각국의 ‘정치권력 전취’를 통해 ‘얻어야 할 세계’를 실현해 갈 수 있을 것이다.
ㅣ '탈성장 코뮤니즘'과 <자본> 다시 읽기
<지속불가능 자본주의>의 저자 사이토 고헤이(이하 ‘사이토’로 약칭)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상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밝힌 바 있다. “학교 일이나 연구 말고 하는 일은? 사생활에서는 육아로 정신이 없다. 아이들과 놀거나 텃밭을 짓거나 여행을 가거나 한다. 앞으로 계획은? 일본어로는 올해 마르크스의 <자본> 입문서를 출간한다. 그 뒤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서 펼치지 못했던 화폐와 국가의 문제를 탈성장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려 한다.”(<경향신문>, 2022년 10월 6일 자 기사 참고)
“인류 존속을 위해선 ‘격차’와 ‘환경’을 동시에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마르크스 연구’에서 기후⋅경제 위기 해법 찾는” 사이토의 인터뷰에서 ‘일상’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답변이 눈에 들어왔던 이유는 그가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이론이 자신만이 정답일 수 없듯이 맑스의 이론도 사이토의 이론도 논쟁과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사이토의 일상적인 삶은 따라 하고 싶고, 권하고 싶은 삶이기도 하다. 육아, 텃밭 짓기와 같은 사람과 자연을 돌보는 노동, 여행(그에게 여행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하며 그 결과물을 책으로 쓰기.
만국의 노동자들, 청년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사이토의 삶은 권장할 만하다고 여긴다. 특히, 한국과 같은 경제 수준과 학력 수준을 가진 노동자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삶이라고 여긴다. 전문 연구자인 사이토와 경제 여건에 따른 처지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능한 만큼의 사이토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본론>을 자신의 눈으로 읽고 그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며 동료들과 토론하고 자신의 언어로 써보는,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자본론>을 쓰는 것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알고 살아가며 다른 사회 더 나은 사회를 살아보기 위해 한 개인의 삶의 일부분으로서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경제위기의 원인인 자본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에 대해 밝히는 사이토의 자본주의에 대한 대책은 ‘속도’와 관련이 있다. ‘생명과 안전’보다 경제 성장을 우선하는 전 지구적인 개발과 파괴가 ‘위기’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명이냐, 경제냐’ 하는 딜레마와 직면하면, 경기 악화를 이유로 근본적 문제 해결이 뒷전으로 밀린다”(지속278)는 것이다. 사이토는 “대책을 늦출수록 더욱 큰 경제 손실이 발생한다. 물론 인명도 잃을 것”(지속278)이라고 쓰고 있다.
사이토는 늦은 대책도 문제지만 빠른 대책도 문제라고 주장한다. 2020년 중국, 유럽 각국, 한국이 코로나 위기에 빠르게 대응하는 과정에서 국가폭력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국가권력을 휘둘러 위에서 억누르는 방식”, “도시를 봉쇄하고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감시하여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엄중하게 처벌한 것”, “개인의 사생활 노출을 감내하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서 감염 확대를 방지”한 것,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국가의 강한 개입과 규제를 전문가들이 요청하며, 사람들 역시 자유의 제약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지속279)
사이토는 늦든, 빠르든 위기의 시대에는 최종적으로 국가권력이 노골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사이토는 그 이유를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사회의 온갖 관계를 상품화하고, 상호 부조하던 관계마저 화폐⋅상품 관계로 바꿔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변화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상호부조의 요령도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가짐도 몽땅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위기에 직면해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이웃이 아닌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위기가 심각할수록 국가의 강력한 개입 없이는 자신의 생활을 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지속281)
사이토의 주장은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된 ‘자본독재국가권력의 전 지구화’라는 오늘에 대한 진단을 연상시킨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과정이자 결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의 온갖 관계를 상품화함으로써 상호부조의 요령도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가짐도 잃어버렸다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자본독재를 가속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기에 직면해 불안해지면 사람들은 이웃이 아닌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위기가 심각할수록 국가의 강력한 개입 없이는 자신의 생활을 꾸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위기가 닥쳤을 때, 사람들이 이웃이 아닌 국가에 의존하는 것,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 문제인가, 국가의 개입이 폭력을 야기하는 것이 문제인가.
만일, ‘상호부조 할 이웃공동체’가 건재해서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면 위기에서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을 것이고,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폭력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이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국가에 의존하더라도 국가가 강력하게 개입하더라도 국가폭력은 발생하지 않는 그런 국가라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러한 가정들 앞에 놓인 오늘의 지구 현실은 이웃공동체도 非자본독재국가도 그 존재감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이웃공동체의 복원과 ‘노동자국가’와 같은 非자본독재국가를 ‘지금, 여기’에서부터 지구 곳곳에 세워가야 한다는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노동자정치와 같은 방식을 통해 이웃공동체를 복원해 나가면서 ‘노동자국가’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의 현실 앞에서 사이토가 도달한 결과는 ‘감속주의deaccelerationism’를 통한 ‘탈성장 코뮤니즘’이다. 사이토가 감속주의를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생산력 지상주의’ 때문이다. 경제성장을 위해서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고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이 생산력증대와 개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생산력증대는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발전법칙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를 반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생산력을 증대시키되 ‘열린 기술’을 통해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생산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것의 핵심이 생산력 발전의 속도를 늦추는 ‘감속주의’인 것이다.
그는 감속주의가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속성인 ‘가속주의accelerationism’에 反한다는 점에서, 즉, 감속으로는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의 속도를 맞출 수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자본주의가 몰락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물질대사에 적합한 생산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감속주의적인 생산방식이 자본주의의 몰락을 막으면서도 지속가능한 사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탈성장 코뮤니즘’은 그가 주장하는 생산방식의 사회인 것이다.
사이토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는 만년기 마르크스의 도달점에 눈길을 주지 않으며 사회주의만 실현되면 노동자들이 기술과 과학을 자유롭게 이용하여 자연적 제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낙관했다. 기술로 ‘물질대사의 균열’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생산력 지상주의는 잘못된 것이며 마르크스가 만년에 했던 생각과도 다르다. 지금껏 진보사관에 속박되어 있었던 마르크스의 <자본>을 ‘탈성장 코뮤니즘’이라는 입장에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지속296)
위기의 현실에 직면한 오늘 사이토는 ‘탈성장 코뮤니즘’이라는 자신의 입장에서 <자본>을 다시 읽을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사이토만의 것은 아닐 것이며, 다시 읽은 결과가 ‘탈성장 코뮤니즘’이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을 다시 읽고 논쟁하며 위기에 대한 해법을 찾아간다는 사실일 것이다.
사이토는 ‘탈성장 코뮤니즘’의 구상을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사용가치 경제로 전환’, ‘노동 시간 단축’, ‘획일적인 분업 폐지’, ‘생산 과정 민주화’, ‘필수 노동 중시’”가 그것이다. 사이토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경제 성장을 감속하는 만큼 탈 성장 코뮤니즘이 지속 가능한 경제로 전환을 촉진한다”, “감속은 가속밖에 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천적”이기 때문에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서는 자연의 순환과 속도를 맞출 생산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가속주의accelerationism'가 아닌 ’감속주의deaccelerationism'야말로 혁명적인 것이다.(지속297)
사이토가 구상하는 ‘탈성장 코뮤니즘’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의문들은 있다. 그런데, 그 의문들은 한 가지로 수렴된다. ‘누가, 어떻게’ ‘탈성장 코뮤니즘’을 실현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사회적 소유‘를 실현해 생산수단을 ’ 커먼‘으로서 민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지속307)거나, “이익보다 보람과 상호부조를 우선하”(지속306)는 ’ 노동자협동조합‘이라는 표현들에서 사이토가 생각하는 ’ 누가, 어떻게 ‘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누가, 어떻게’에 대한 의문이 계속 찾아드는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자본독재국가권력’이 지배하는 전 지구적인 현실 때문일 것이다. ‘생산수단’을 누가 ‘사회적 소유’로 실현할 것이며, ‘커먼’으로서 민주적으로 관리할 것인가. 성장지상주의의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의해 굴러가는 전 지구적인 ‘자본독재국가권력’이 자발적으로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커먼으로서 민주적으로 관리할 일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내재한 법칙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전 지구적인 요구와 요청을 통해서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여 ‘커먼’으로서 민주적으로 관리하려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도 ‘주체’는 누구인지 묻게 된다. ‘자본독재국가권력’에 의해 직접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국가의 성격을 ‘노동자국가’로 전환하지 않는 한, 그러한 요구와 요청이 거부되거나 자본가계급의 이윤 증식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에서의 ‘사회적 소유’에 그치기 십상일 것이다.
‘노동자협동조합’의 경우에도 ‘자본독재국가권력’의 지배가 전 지구적이라는 점에서 글로벌 동맹 권력을 그대로 둔 채 ‘보람 있는 상호부조’가 언제까지 얼마나 지속되고 확장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노동자협동조합’을 확장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할 리 없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노력과 함께,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도 ‘노동자국가’로 국가의 성격을 전환시켜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026.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