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세상 소란해도 고요히 한 걸음, 세상 험악해도 웃으며 한 걸음, 세상 팍팍해도 춤추며 한 걸음, 세상 빨라져도 천천히 한 걸음, 세상 불평등해도 나란히 한 걸음, 세상 삭막해도 꿈꾸며 한 걸음, 세상 거짓이어도 진실히 한 걸음, 세상 불만이어도 감사히 한 걸음,세상 따로여도 손잡고 한 걸음, 세상 무거워도 가볍게 한 걸음, 세상 혼탁해도 꾸준히 한 걸음.
세상 누가 뭐래도 나는 해방을 쓰며 해방을 위해 한 걸음 내 딛는다. 해방을 쓰며 조금은 다른 삶, 조금만 다른 삶, 조금 더 다른 삶을 짓고 있다. ‘사랑 그리고 기다림’의 ‘보라의 시간’ 속에서 ‘흔히 볼 수 없고 쉽게 만날 수 없는’‘도시의 무지개’ 선물을 주고받으며 ‘가 닿으려는 꿈’을 향해 한 걸음 내 딛는다.
굵은 글씨는 내가 지은 책 제목이기도 하다. 나는 해방을 쓰고 책을 짓는다. 책을 짓는 행위는 해방을 지속적으로 써나가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거대한 광고를 하겠다면 모를까 돈이 없어도 책을 지을 수 있는 시대지만 예나 지금이나 문제는 ‘글’이겠다. 어떤 글을 쓸 것인가.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기다림
‘기다림’을 이야기할 때 떠오르는 것들 중에는 생텍쥐 페리 <어린 왕자>의 말들이 있다. ‘아름다운 노을을 보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거나, ‘네가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행복할 것’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에 관한 것들이다.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도 있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이 시구가 나에게는 ‘기다림’에 대해 할 말 다했다고 여겨질 정도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도 떠오른다. 기다림을 사유하게 한다. 기다린다고 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다리지 않을 수도 없다. 기다리지 않고 간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작가가 말하려는 기다림의 대상, ‘고도’가 그 무엇이든, 독자가 받아들이는 그 대상이 그 무엇이든, 기다림의 행위만큼은 중요해 보인다. 아니, 기다린다는 행위야말로 중요해 보인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시구처럼 마냥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다림의 대상에게로 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삶은 ‘기다림’, 기다리는 중에 있는 것이 삶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해서, 대상을 찾고, 만나기 위해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나에게 묻는다. 그 물음이 나에게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살고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ㅣ자신과의 싸움
나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맞다. 싸움도 경쟁도 피하고 싶고 갈등은 불편하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운 좋게도 미움보다는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러기 위해서 노력도 했다고 여긴다. 앞으로도 그렇게 운 좋게 노력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렇다고 싸움도, 경쟁도, 갈등도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이 되어도 가급적 안 그러고 싶지만 나 역시 누구 못지않게 잘 싸우고, 경쟁하고, 갈등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기도 하면서 살았던 것도 맞다.
요즘의 나는 ‘싸우거나’, ‘피하거나’, ‘불편해하거나’보다 좀 더 ‘수용’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흐름에 몸을 맡기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예전에도 ‘흐르는 강물처럼’ 살려는 것처럼 보였는지 지인들에게 너무 흐르기만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적도 있긴 하다. 그런 나의 모습을 돌아보면 역시 사람은 잘 안 변하나 생각을 한다. 한편으로는 역시 싸움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생각도 한다. 오랜 나 자신과의 싸움 덕분인지 요즘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 조금 편해졌고 즐기기도 한다.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편임에도 ‘자본 권력’과의 싸움에는 관심을 놓을 수가 없다. ‘자본권력과의 싸움’의 의미는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적대적 대립 관계가 사라진 상태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노동자들이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민주적인 사회’, ‘평등한 사회’에 대한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자본 권력’은 자본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대 자본가들과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려 공동체를 파괴하는 모든 권력을 의미한다. 자본 권력들을 내 편으로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폭력적으로 물리치는 것만이 싸움은 아닐 것이다. 왜 싸우는지 싸움의 목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잘 싸워야 하는 것이다.
어디서든 어떻게든 싸우고 있다면 그걸로 됐다고 여긴다. 잘 싸우겠다면 어떻게든 잘 싸울 것이고, 싸움의 방식이 유일하다면 유일한 방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양하게 싸워야 한다면 다양하게 싸우면 될 것이고 당장 필요한 싸움이라면 해야 할 것이고, 필요 없는 싸움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진보적’이라면 그 싸움을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 싸움을 한다고 진보적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원론’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삶’이라고 여긴다.
잘 싸우고 있는지, 싸움의 목적을 망각하고 있지 않은지, 자기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며 물어보며 나아갈 수 있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늘 즐겁다.
ㅣ지금의 시간은
아버지와의 불화 때문인지 아버지가 없는 내가 부럽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으면 좋겠다면서 말이다. 그에 대해 나는 별 다른 감흥없이 듣고 있는 게 전부였다. 애초에 나에게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재에 따른 결핍도 느끼지 못했고 아버지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아버지에 대해 해 줄 말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란 존재의 부재를 다른 가족들이 메워주었기 때문에 결핍을 못 느끼며 살았을 수도 있겠다. 그러다 몇 해 전에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기억에 없는 아버지가 생각난 적이 있다. 그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인 아버지가 아리를 목말 태우고 자랑스럽게 동네를 다녔다는 장면에서 나의 아버지도 나를 목말태워 그리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 것이다. 소설 속 아버지가 사회주의라는 해방 세상을 만들려 했다는 점에서 나의 아버지도 판사가 되어 정의로운 해방 세상을 만들려 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기도했다. 나의 아버지가 국가권력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별 다른 감흥은 없다. 더 이상 국가권력에 의해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부다.
그처럼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의식할 필요없이 잊혀진 존재로 여기며 살았는데 작년 가을에 문득 아버지가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깜짝 놀랐다. 수십년을 살아오면서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겪는 감정이었다.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깊은 글들을 읽으면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나 싶다.
남도 아니고 나를 존재하게 한 두 분 중 한 분인데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가 있는 곳으로 언제든 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 보고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같다.
나의 삶에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적지 않았다. 사람을 크게 여기며 살았다. 사람들을 좋아했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기도 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부재를 의식하지 않으며 살 수 있었던 것도 그들 때문이었을 것이고 나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 사람들을 더 찾았던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몇 해 전부터 사람들에 대해 소홀해진 것도 사실이다. 큰 의미나 이유는 없다. 연구하고 글 쓰는 나의 삶에 조금 더 충실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누군가는 서운해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시간은 그런 감정들이 나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2026. 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