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영세 사업장이나 중소기업 종사자들, 자영업자, 그 중에서도 영세 사업주들, 지방대 졸업생 자녀를 둔 부모들이 목소리를 높여가며 국가 정책을, 정치인들을, 그들의 무책임과 무능함을 비판하는 것은 오랜 역사적 전통이고 앞으로도 그러한 관행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국가 정책과 정치인들의 무책임과 무능함이 계속된다면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그와 같은 관행 속에서도 예전과 달라진 것들도 있다. 그들이 이제 이전과 다른 정치를 말하고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전 지구적인 경제 양극화, 기후 재난, 학살 전쟁이라는 인류 존망의 위기는 각국의 국가 정책과 정치인들의 책임으로부터, 국가권력과 정치 권력의 민주화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통과하여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상 속에서 피부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겠다.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말하지 않을 수 없을만큼 위기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빌리의 꿈과 아버지의 배신
발레는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아버지와 형의 편견 속에서 발레에 대한 빌리의 꿈은 커져만 간다. 재능이 엿보인다는 지도 선생님의 설득이나 꿈에 대한 간절함을 내보이는 빌리의 모습이 그들의 편견을 깨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아니, 자식의 꿈을 키워주는 것은 당연한 부모의 도리였던가.
그렇게 아버지는 빌리의 꿈을 위해 당신의 신념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광부인 아버지는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파업을 하고 있었지만 빌리의 발레학교 입학금 때문에 파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 결국, 아버지는 다른 파업원들에게 배신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를 자식의 꿈을 위해 감수한다. 영화 <빌리 엘리엇 Billy Elliot> 이야기다.
영화 같은 현실, 현실 같은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떠올려지고 이야기되곤 한다. 영화 속 빌리처럼 현실에서도 사회적 편견을 넘어 꿈을 이루어가는 이들은 있다. 어쩌면 꿈을 이루었기에 기억되고 이야기되는 것일 수도 있다. 얼마나 간절한가? 간절함의 크기는 꿈을 좌절하게 만드는 사회적 편견이나 현실적 조건을 ‘넘어서거나 포기하거나’를 근거 짓는다.
간절한 만큼 꿈은 이루어진다고, 꿈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간절하지 않다면 굳이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저 꿈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꿈꾸는 것만으로도, 꿈꾸는 것 자체로도 삶에 의미와 가치를 더해 준다고 말이다.
간절하다면, 간절하기에 꿈을 이루고 싶기에 꿈을 가로막는 편견이나 현실적 조건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회적 편견은 편견을 부단히 부정하는 것으로 편견을 허물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편견은 오랜 시간을 두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문화적인 것이어서 강고한 벽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빌리의 지도 선생님과 같이 편견 없는 이들에 의해 그 편견은 허물어지기도 하는 것일 테다. 편견은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강고하게 유지되는 것이지만 한 사람에 의해 허물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배신도 그럴 것이다. 자식의 꿈을 위해 파업에 동참하지 못한 것이 배신자라고 손가락질받을 일인가. 양자택일의 선택지 속에서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드는, 사회구성원들을 궁지로 내모는 꽉 막힌 사회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배신자인가. 과연 배신자는 누구인가.
사회의 계약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며 때로는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파업을 포함한 노동쟁의를 하는 것은 법이 보장하는 합법적인 행위다.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있기에 사회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 노동자들이 ‘50억 클럽’과 같은 귀족 흉내를 내겠다고 노동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자신의 삶과 꿈을 일구어가는 노동자들 앞에서 수십억의 재산을 어떻게 축적했는지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배신자들일 것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꿈보다 자식들의 꿈을 위해서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뒤로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부모들이 자식들의 삶만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도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참여와 노동시간을 얼마나 줄일지 더 평등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지 다투는 것은 의미 있어 보인다.
성(性)에 대한, 노동에 대한, 노동조합에 대한 편견이, 또한, 세상의 모든 편견이 허물어지기를 바라는 꿈도 빌리의 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간절한 바람에 의해서도 편견은 허물어지고 꿈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바람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만인이 평등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ㅣ책임 정당
『책임정당』의 저자들은 「왜 두 개의 정당으로도 충분한가?」라는 글에서 “승자가 독식하고 패자는 모든 것을 놓치는 정치”인 양당 체제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여러 이유들 중에는 ‘불확실성’과 ‘지지층’이 있다. “두 개의 정당이 집권을 열망하며, 어느 한 당이 집권에 실패하면 다른 당이 성공한다는 것을 서로 인식하고 있”는 반면에 다당제에서는 “규모가 큰 정당도 자기 당 혼자서는 정부를 구성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즉, 선거 과정이나 선거 승리 이후에도 ‘연합’에 기반 해야 하기 때문에 정강 정책부터 정당 운영이나 정부 구성에서 “다당제에서는 상황이 더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양당제에서는 “협소한 유권자층에 호소하는 일은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두 정당은 “핵심 지지층의 이익만 챙기는 일을 자제하고 (…) 자신과 핵심 지지층이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인민 대다수가 원하는 것도 생각해야”하는 반면에 다당제에서는 정당들이 핵심 지지층 이외에 다른 누구에게 지지를 호소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일단 핵심 지지층으로부터 최대한 지지를 얻어내야”하며, 그래서, “정당이 난립할수록 각 당의 정강 정책은 더 경직되고 배타적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들은 2015년 그리스의 중도 정당들이 바로 그런 일을 겪었는데, 급진 좌파 연합 시리자SYRIZA도 그런 경우라고 주장한다. 낸시 로젠블룸을 인용하여 그들은 “당파성이 공동의 과제를 추진하는 가운데 다른 당과도 일체감을 가지도록 확장될 수 있으며, 그것이 건강한 민주적 경쟁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정당들은 건전한 당파성을 발달시키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책임정당』의 저자들은 “정책으로 경쟁하는 일이야말로 건강한 민주주의의 생명소”이며 이를 위해서는 “크고 강한 두 개의 정당이 가장 좋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크고 강하다’는 의미는 저자들이 주장하듯 “더 나은 공공 정책을 위해 책임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끄는”, “광범위한 유권자 집단의 장기적 이익을 위한 일단의 정책을 약속할 수 있는”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한국은 커다란 두 개의 양당 체제임에도 『책임정당』 저자들이 희망하는 ‘정책 경쟁, 공공 정책에 대한 책임성, 광범위한 유권자의 이익을 위한 정책 약속 실현’과 같은 ‘책임정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오히려 ‘정체성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두 거대정당이 지배하는’, ‘별 차이 없는 쌍둥이 정당들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미국 정치를 닮아’(타리크 알리)가는, ‘정책도, 책임도, 약속도 없는’, ‘돈과 권력의 공생이 극단적인’, “미국식 변형”, “크지만 약한 정당”정치가 한국 민주주의의 오늘날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 상태가 선거제도나 정당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것일 테다. 그런 관심은 노동자정치와 좌파-당-운동의 관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하는 가운데 다양하고 복잡하게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여러 좌파정당들의 연합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여러 좌파당들이 연대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도 ‘분열’을 넘어 ‘분리와 연결’의 ‘상호작용’을 통한 ‘연합정당’ 정치운동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껍데기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를 구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한 관건은 ‘거대 양당이 지배하는 대의제 아래에서 ‘유권자의 결정권’이 어느 정도까지 행사될 수 있는가’와 ‘시리자 및 포데모스가 남긴 과제이기도 한 “강한 좌파 연합 구축”을 어떻게 해 나갈 수 있는가’일 것이다.
한국사회에도 특수성이 있듯이 각 사회마다 그 사회가 처한 사정이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양당제, 다당제, 연합정치에 대한 논의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보다 중요해 보이는 사실은 ‘유권자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민중을 대변하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와 같은 정당을 ‘노동자민중들이 노동자정치와 좌파-당-운동을 통해서 집권을 목표로 이뤄가야 한다는 것’일 테다.
ㅣ노동자 정치를 위하여
노동자정치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노동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임금노동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정치에 의해서 삶은 달라진다. 어떤 정치를 하느냐에 따라 노동자의 삶은 달라진다. 이때 정치는 정치인을 선출하는 현실정치일 수도 있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노동자들이 관계를 통해 이루어가는 일상정치이기도 하다. 서로 무관하지 않은 그 정치들은 노동자의 사고와 행위를 변화시키며 노동자와 자본가의 권력관계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들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 그 자체가 정치다. 노동자가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바꾸기 위한 정치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불변의 자연법칙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적 산물이고 그래서 인류의 힘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자세는 역사적 경험이나 논리적 정합성을 넘어서는 현실적인 필요에 부합하는 인식이다. 그리고 그 필요에 대한 인식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경험들을 통해 생성될 것이다. 그렇게 생성된 인식은 다시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경험들을 생성해 낼 것이다. 인식과 경험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성해 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성된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자발적 연대’를 통한 ‘단결’은 노동자들이 처한 계급적인 처지로 인해 생성될 가능성이다.
대량실업, 극단적 양극화, 환경재앙, 전쟁 위협과 같은 문제들을 자본 권력을 대변하는 기존 정치 권력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본 권력은 기존의 지배⋅착취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 들 것이기에 노동자들이 자본독재 권력과의 사활을 건 전쟁을 통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거나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권력을 상대로 하는 이 전쟁을 수행할 중심 주체는 태생적으로 자본과 적대적 모순관계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자발적 연대’를 통한 ‘단결’은 새롭게 창조해야 할 가능성이 아니다. 이미 자본 권력에 의해 강요된 ‘자발적 연대’를 통해 ‘단결’하고 있는 노동자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기존의 노동자 세력에 노동자들이 스스로 함께 결합할 수 있도록
노동자정치가 생성해 내는 그 만큼의 가능성일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의 생성은 새로움과 창조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자본의 무한 증식과 부의 집중과 상대적 빈곤 내지 양극화의 심화는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본질적 경향이다. 또한, 축적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자본이 그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려 드는 것도 필연이다. 그런 이유에서 노동자 민중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저항이 없으면 대량실업과 절대빈곤의 양산 또한 불가피할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저항의 방법은 노동자 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체인 민주국가, 곧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노동자정치를 통하지 않고는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노동자국가를 이루는 것도 요원할 것이다. 노동자들 스스로 노동자들이 함께하려 애쓰지 않는 한 노동자임에도 자본가의 사고와 행위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들의 의식이 지배적인 의식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정치는 그와 같은 지배 관계를 바꾸어 내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은 ‘평등’이라는 가치에 기반하여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그 과정은 사회구성원들 위에 군림하며 소수 지배계급의 독점적 이권을 대변하는 형식적 민주국가가 아니라, 사회의 절대다수인 노동자 민중의 권익을 구현하는 과정일 것이다.
노동자정치는 지금 여기의 일상에서부터 구현해 나가는 과정의 결과로서 민주주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정치가 노동자들만의 정치일 수 없으며 모든 차별과 억압을 없애려는 해방운동들과 연대하는 과정이며 그 자체가 민주화의 과정일 것이다. 노동운동과 노동자정치만으로 모든 불평등을 해소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평등에 기반하여 모든 해방운동들과 연대할 때 모두의 불평등을 해소할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 해결과 노동자국가 건설이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시적 사안별 연대를 넘어 지속적이고 유기적인 연대와 운동의 통일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며, 전체 운동 속에서 떠맡을 수 있는 적합한 역할이 무엇인지에 관해 공감대를 넓혀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공감대를 넓히는 일은 노동자 정치가 떠맡아야 할 과제일 것이다.
자본 권력의 국제적 성격을 감안 하면 연대의 범위는 일국 내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기본원리는 노동자 국제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자본이 저개발국들의 저임금 노동자들 덕분에 초과이윤을 뽑아올 때, 또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불평등하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시달리며 3D업종을 연명시키고 있을 때, 한국 노동자들이 자본 권력의 편에 서지 않고 외국 노동자들 및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하는 경험을 축적해가는 것은 노동자 국제주의 성장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의 축적을 발판으로 노동자 국제주의 조직의 부활과 제국주의 자본에 맞선 전략 구사도 가능해질 것이다.
노동자정치는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에 대해 면밀히 분석하고, ‘평등’이라는 가치에 기반한 노동자들의 연대를 확산시키고, 이미 주체적인 노동자들의 자발성을 자본에 대한 복종에서 노동자들의 연대로 성격을 바꾸어가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자들과 함께 다양한 형태로 모이고 모여 더 나은 삶을 위한 정치를 하자는 것이겠다.
2026. 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