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28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가족은 ‘가장 소중한 것’이면서 ‘가장 내다 버리고 싶은 것'. 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2006) 개봉 당시 영화사 측에서 실시했다던 ‘가족’에 대한 설문 조사결과이다. 나의 경우는 둘 다 아니라고 해야겠다. 성별, 연령, 지역, 경제 여건, 개인 사정 등 설문 참여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선택이 달랐을 것이다. 나처럼 가족에 대해 가장 소중하다거나 가장 내다 버리고 싶다거나 할 만큼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누구든 가족을 이룬다면 '화목한 가정'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내다 버리고 싶은 가족'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촘촘한 그물망 같은 국가 정책이 필요하겠고, 가족의 형태와 의미에 대해 넓게 열린 사회가 되는 것도 필요하겠다. 여성학자이자 평화학자인 정희진의 주장처럼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이 된다면 가족으로부터의 해방,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일이 훨씬 가까워지지 않겠나 싶기도 하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인정과 욕망 4


‘인정과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가족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소녀 같은 누나와 사고뭉치 남동생, 그의 20살 연상의 연인이자 시어머니 뻘 올케,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는 엄마와 이런 엄마가 지겨워 가출한 딸, 쪼잔할 정도로 소심한 남자와 헤플 정도로 정이 많은 여자. 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에 등장하는 ‘가족과 사랑’의 주인공들이다.

영화 개봉 당시, 영화사 측에서 실시했다던 ‘가족’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기억에 남은 내용은 ‘가족’에 대한 상반된 결과였다. 가족은 ‘가장 소중한 것’이면서 ‘가장 내다 버리고 싶은 것‘이라는 결과가 그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이어야 할 것 같은 ’가족‘이 가장 내다 버리고 싶어진 것은 애초에 ’성별이나 위계‘에 따른 억압이 없는 대등한 관계의 형태였던 가족이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을 이루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관계가 행복하기는커녕 되려 억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억압적인 이데올로기 요소들(가부장주의, 남성중심주의, 섹슈얼리티, 혈연주의 등)로 인해 야기된 ’가족주의‘는 야만이라며 가족 해체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해체될 가족이 구성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그것이 해체주의자들의 노력에 따른 것이든, 아니면, 자본주의의 ’상품화‘, ’파편화‘의 원리에 따라 해체된 것이든, 해서, ’가족과 사랑‘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었든, 아니면,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에 갇혀있든, 중요해 보이는 것은 ’관계‘의 문제다.

’가족이나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든, 아니면 또 다른 이름을 가지든, ’자신을‘, 그리하여 ’서로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관계‘의 문제 말이다. 어떻게 관계할 때, 어떤 사회의 형태일 때, 서로 인정(사랑)을 주고받으며 관계 파괴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가족의 탄생>이 개봉한 지 17년이 지난 지금, ‘핵개인화’, ‘저출생’, ‘초고령화’, ‘100세 시대’, ‘비혼주의’, ‘1인 가구’, ‘동성부부’, ‘가녀장의 시대’(이슬아 작가) 등 이제는 제법 가족과 사랑의 모양이 다양해져서인지 당시에는 생소해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던 영화 속 ‘가족과 사랑’의 모습들이 아주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지만 여전히 생각나는 ‘사랑’도 있다.

영화 속 세 번째 이야기, 경석(봉태규)과 채현(정유미)의 사랑이 그것이다. 경석과 채현의 사랑이라고 했지만 이 글이 궁금한 것은 ‘채현’의 사랑이다. 채현은 경석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두 사람의 사랑에서 경석의 채현에 대한 반응이다.

‘경석에게 무심한 채현, 경석보다 남들에게 더 잘하는 채현, 채현 곁에 있어서 오히려 외롭다는 경석, 채현이 남들과 았는 게 불안하다는 경석, 해서, ’차라리 날 놔 줘‘라는 경석. 경석이 주고받고 싶은 사랑은 자신에게 무심하지 않은, 남들보다 자신에게 더 잘하는, 곁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채현이 남들과 있어도 불안하지 않은 사랑이겠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채현, ’경석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더 잘하는‘ 채현,‘ ’이기적인 사람이 무섭다‘는 채현, ’무조건 따듯한 사람이 좋다‘는 채현, 해서 자신도 모두에게 그런 따듯한 사람이고 싶다는 채현. 채현은 경석을 사랑하는 것일까. 채현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나만 바라봐주는 언제나 내 편‘이면서 ’모든 사람에게 따듯한‘ ’사랑‘의 관계, 가능하지 않을까.



ㅣ일부일처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 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을 믿고 실천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조증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개 사랑의 황홀감은 몇 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인생의 매 순간을 혁신하며 ‘나날이 새롭게’ 사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중단 없는 상호 발전을 통해 관계의 질이 진화하지 않는다면, 그 뒤 시간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권태와 제도를 통한 감정의 구속만이 남을 뿐이다.[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68~69]

위 문장에서 ‘일부일처제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계셔서 제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기 위해서 일정한 제도(법이나 관습)가 필요합니다. 그 제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거나 폐기되기도 합니다. 구성원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제도는 생겼다 사라졌다 합니다. 저는 ‘제도의 효과와 강제성 여부’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도가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면 좋다는 것이고,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억압한다면 문제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제도가 좋은 것인지, 억압적인 것인지는 사회 구성원들의 처지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일부일처제), 가부장제’라는 제도도 기존에 없던 것이 아주 오래전 사회의 필요(사유재산의 상속과 보호)에 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들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변화해 온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예전만큼 결혼이나 출산이 강제적이지 않다. 예전만큼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하지 않는다. 예전과 같은 시월드, 남아선호, 남성중심은 거의 없어졌다. 오히려 며느리 중심이다. 더 이상 이혼이 여성에게 불리하지 않다. 예전에는 남성들이 주로 혼외정사(성매매, 외도)를 했지만, 요즘은 여성들도 한다. ‘일부일처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부 다처제’라거나 ‘가족 이기주의’라는 문제는 일부 부유층이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그 이유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든, 사람들의 권리의식 신장 때문이든, 그 모두 때문이든 결혼(일부일처제)이나 가부장제가 낳았던 폐해들이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경험적 사실들을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제도들의 ‘현재적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서 얘기했듯이 제도의 강제성 측면은 사라지고 있다고 할 수 있어 보입니다. 다만, 효과적인 측면, 즉 그 제도가 우리 삶을 이롭게 해주는가라는 점에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 제도들이 존속되어야 한다면 말입니다.

가부장들이 권위주의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든든한 어른 역할을 해주고, 결혼이 두 사람의 삶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를 가지는 가부장제와 결혼(일부일처제)이라면 무슨 문제인가 싶습니다. 그와 같이 ‘평등해서 풍요로운’ 사회에서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죽을 때까지 화목하게 오순도순 살아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누구나 그런 삶을 바라며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일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회라면 개인들의 문제라기보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살아 남기 위해 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정치·경제적인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이 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불평등과 차별이 기존의 ‘가부장제와 결혼제(일부일처제)’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기 보다 관계 자체를 해체 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자신들의 ‘자율’을 중요히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봅니다. 사회의 구조나 제도가 야기하는 불평등이나 차별을 부단히 없애 나가려는 사람들, 자신의 자율을 위해서 타인의 자율을 억압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ㅣ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때가 되면 결혼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출산하는 사회 형태는 점차 사라져가는 듯하다. 여성의 몸이 건강할 때 결혼을 해서 재산을 대물림할 ‘남성’을 출산하는 것이 사람구실 하는 것이라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주의 사회 형태는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때가 지나도록, 결혼하지 않으며(비혼주의), 부모님 집에 얹혀살거나(캥거루족), 결혼해도 의도적으로 아이를 낳지 않거나(딩크족), 이혼하는 것이 결함이 되지 않거나, 결혼과 가족의 구성에서 개인의 선택이나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엥겔스가 모건의 <고대사회>라는 책에 기반하여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쓰고 있듯이, ‘군혼제’(번식), ‘대우혼’(타 혈족 간 교차 혼인)의 아버지를 뚜렷이 알 수 없는 모계사회를 거쳐, 생산력 증대에 따른 사유재산의 소유와 그를 지키기 위한 남성 중심의 부계사회의 출현, 그와 함께 형성된 일부일처제는 사유재산을 대물림하기 위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이른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가 사유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엥겔스가 쓰고 있듯이, 경제활동이 아니라 ‘사랑’에 기반한 결혼은 재산이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나 가능하다는 말도 일리 있어 보인다. 건강한 두 남녀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언젠가 재산을 물려주는 일부일처제의 결혼제도가 문제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결혼이 경제적 조건이냐, 사랑이냐는 이분법은 진부해 보이기도 한다. 두 남녀의 선택의 문제라고 본다. 경제력 때문에, 외모 때문에,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서로를 선택하거나 ‘사랑’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이유에서든, 언제가 되었든 결혼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녀를 출산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혼을 했지만 이혼할 수도 있고, 재혼할 수도 있다.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 고 본다. 문제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는가에 있다고 본다. 한 사회의 남성과 여성이 경제적인 활동을 통해 결혼과 출산을 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는 자신의 책 <유토피아>에서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가족, 이웃들과 즐겁게 살아가는 곳’을 ‘유토피아’라고 규정한 바 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생계를 해결하기가 힘들다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하기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하여 결혼에 이른다 해도 생계를 해결하기 급급하다면 부부가, 부모가 자식을 돌보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분히 원론적인 이야기라고, 일반화할 수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개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각자의 사정이 복잡해서 다양하고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기도 하다. 나 역시 그런 개인들이 선택하는 삶을 중요히 여기는 입장이라서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 삶이라는 것이 물질적인 풍요만이 전부일 리 없고, 물질과 정신이 서로를 보완하면서 상승해 가는 것이기도 하고, 남녀가 자신들이 선택한 ‘사랑’으로 행복과 고통을 나누며 결혼도 하고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다시 읽으며 이와 같은 글을 쓰게 된 것은, ‘생계 걱정 없이 가족, 이웃과 즐겁게 살아가는 곳’이 ‘유토피아’라는 토마스 모어의 말이 생각 나서다. 토마스 모어가 말하는 ‘유토피아’를 여전히 꿈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인다면, 그러한 유토피아에 이르기 위해서는 ‘국가의 성격을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바꾸어 가는 것’,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확장해 가는 것’, ‘사이토 고헤이의 ‘탈성장 코뮤니즘’의 구상을 실현해 가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2026. 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