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29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학벌사회, 입시지옥, 사교육, 교피아, 서열화. 한국 사회에서 변하지 않고 고착화된 교육에 대한 문제들이 결국 교육 불가능이라는 진단에 이른 것이 10년도 넘은 것 같다. 저출생으로 학생이 없으니 돈벌이가 안 되니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교육 자본의 논리도 있지만, 초중고는 입시 교육, 대학은 취업교육이다보니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이루며 살아갈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사람을 길러주는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교육 현장 종사자들도 자본권력, 국가 권력, 정치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더불어 사람답게 살아갈 교육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자본의 논리로부터 아이들도 학부모도 해방된 교육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정희진)도 교육 해방에 도움이 안 되겠나 싶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자본과 교육


교육의 문제는 자본의 문제다. 교육의 문제는 주체의 문제다. 주체의 문제는 자본의 문제다. 자본이 교육을, 주체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화폐로 교환할 수 있는 상품만이 유용한, 상품생산 형태가 전면화한 자본주의 생산양식 아래에서 교육과 노동자도 상품생산 형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자본이 채워줄 리 없는 노동자의 해방, 노동자들이 서로를 채워주기 위한 노동자 교육 운동은 획득해야 할 필연적인 과정이다. 노동자들 스스로 서로를 교육하는 과정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노동자의 부족은 늘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 교육 운동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 교육 운동을 실현하는 것은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의 위기는 교육의 위기라고 할 수 있듯이 자본위기의 원인은 교육위기의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교육과 주체의 문제가 자본의 문제라는 말은 이중적인 함의를 지닌다. 먼저, “대학서열은 돈의 서열”이라는 이범의 주장처럼 한국교육의 혹은 한국사회의 서열화는 자본의 문제다. 대학서열이, 서열이 높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사다리의 높은 곳을 차지하게 하듯이, 혹은 그렇다고 착각하게 하듯이 교육도 주체도 서열화되어 있고 그 서열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이라는 것이다.

자본이 많은 대학이, “학생 1인당 교육비의 순위가 대학의 서열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수 대 학생 비율, 실험실습비 등 핵심적인 교육 여건을 좌우한다는 것이다.”(이범) “한국은 대학 간 격차가 극심함과 동시에 평균적인 대학 교육의 질은 낮은 것이다. 대학에 대한 국고 지원이 선진국 대비 매우 적기 때문이다.”(이범)

이에 대한 해결책은 이범이 지적하듯이 ‘돈의 서열’을 ‘돈의 균형’으로 맞추면 될 것이다. 하지만 자본권력이 자본을 공평하게 나눌 리 없다는 것이 ‘돈의 서열’을 돈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비교 우위에 서 서열이 높은 대학이 자본의 이윤 창출에 유리하기에 국가의 재정을 나눈다거나 하는 것은 자본의 윤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학재단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대학을 무상화한다거나 공립형으로 만든다거나 평준화한다거나 하는 일은 자본이 지배하는 한 우연에 불과한 일일 것이다. 사학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사립대학만이 아니라 자본 국가가 소유하고 있는 국립대학도 마찬가지다.

자본 권력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국가가 대학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자본 권력의 사유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육과 주체가 자본의 문제라는 말은 자본에 의해서 교육도 주체도 서열화되고 그 순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교육과 주체가 자본의 문제라는 말이 담고 있는 또 하나의 함의는 노동자 주체가 자본 국가권력을 넘어설 때에만 자본에 의해 서열이 결정되는 자본 국가권력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 국가권력에 의해 교육도 주체도 서열화된다는 의미에서 자본 국가권력을 노동자 국가로 그 성격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노동자 교육 운동일 것이다. 노동자의 주체적인 운동 없이는 자본 국가권력을 넘어서는 것도, 노동자국가를 이루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포이어바흐의 기계적 유물론을 비판하면서 “환경의 변화와 교육에 관한 유물론적 교의는 환경이 인간들에 의해 변화되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교육의 의미는 자신과 타자를 포함한 환경을 탐구하고 상호 교육하며 능동적으로 환경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노동자들이 공교육 제도의 안과 밖에서 교육 운동을 해 나가는 과정이자 결과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현재의 상태인 자본주의의 발전 경향과 법칙을 탐구하면서 출판, 언론, 당(黨), 노동조합 등의 활동을 통해서 교육을 실천하였다. 자본 권력의 지배 질서를 살면서 또한 그에 맞서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삶을 통해 요구한 것이다.

노동자들 스스로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탐구하고 교육함으로써 자본독재의 구조를 변화시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현재의 상태에 대한 지양(止揚) 없이는,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조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는 요원할 것이다. 과학적인 인식과 실천에 의해 지양한 만큼의 노동자 주체와 자본주의 구조의 의미 있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노동자 교육 운동에서 필자가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동자들이 자신이 속한 공교육 제도의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영역의 곳곳에서 교육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치(自治)의 장(場)을 폭넓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두 명에서부터 수천 명에 이르기까지, 소모임 형태에서부터 대규모 기구에 이르기까지 가능하다고 본다.

그 경우 무엇보다 자치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운영 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애초에 운동이 자생적이거나 자발적이라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타의에 의해서 운동이 시작되더라도 그 과정만큼은 스스로 해 나가야 하는 것이 운동이 가지는 힘 있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이 그러한 운동들이 연결하고 연결되어 언제든 연결할 수 있다는, 연결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의 단단한 힘을 지닐 수 있는 운동이 되기를 소망한다. 더 나아가 그와 같은 연결을 통해 모종의 합의된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노동자 교육 운동이 자본을 넘어 노동자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이기를, 그 과정이 일하는 노동자들이 행복한 노동자국가가 되어 가는 과정이기를 소망한다.



ㅣ쿠바와 교육


쿠바의 세출 구성을 보면 정부가 무엇을 중요시하고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는지 알 수 있다. 쿠바 정부 본예산의 세출 항목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항목은 ‘교육비’로 무려 25.1%를 차지한다.(쿠행42) “국민총생산 GDP의 12.84%를 교육에 투자하고 있”(쿠행16)다.

심성보(교육학)는 “전국의 모든 곳, 외딴 농촌의 학교에까지 잘 훈련받은 교사가 배치된다. 이 점은 재정적인 면에서 쿠바교육이 성공한 비결”(쿠춤145)이라면서, “유네스코가 핀란드와 나란히 모델로 추천하는 카리브해의 교육대국, 쿠바에서 “행복하고 풍성한 인생을 준비하기 위한 교육, 인간이 진정으로 해방되기 위한 교육”을 보게 된다(쿠춤138)고 쓰고 있다.

쿠바는 “만 한 살이 되면 가는 어린이집부터 대학과 직장인이 다니는 학교까지 모두 무료”(쿠행24)라는 점에서, “사는 지역이 배움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쿠행28)는 점에서 ‘평등’하다. 쿠바정부가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 결과 도시보다 농촌의 학교 수가 더 많다.

쿠바인들이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평등한 교육 환경을 만들도록 교육받은, 평등한 교육 환경을 실현하려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평등하게 살도록 교육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교육받은 대로 평등하게 살아간다면 그 사회는 ‘평등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부와 권력을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한 교육이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평등하게 살려는 사람들”에 의해 불평등한 사회는 평등한 사회로 변화해 갈 것이다.

카스트로는 한 나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학교’라고 생각했다. 쿠바의 교육혁명은 물질적 풍요를 창출하는 것과 이에 부응하는 사회의식을 가진 시민을 동시에 길러내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이를 위해 개별 인성의 발달과 사회의 발달이 동시에 요구되며, 기술과 지식의 계발을 통해 생산력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쿠바의 교육을 성공적으로 이끈 카스트로는 병영과 경찰서를 학교로 바꾸어 나갔다. 혁명 초기부터 카스트로는 교육을 기본적인 인권이자 평생학습으로 보았다. 이런 이상은 심각한 경제위기의 와중에도 버려지지 않았다. 성공을 가져다준 핵심 요인은 도시와 농촌 그리고 교외 지역의 학교를 통틀어 교육 기회의 접근성과 학습의 질을 평등하게 창출하려는 지대한 노력에 있었다.(쿠춤139-140)

게바라가 실현하고자 했던 세상은 단순히 경제 체제의 변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부와 소득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인간이 소외에서 벗어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새로운 인간 hombre nuevo’으로 변화해야 하는데, 그 변화는 의식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하고 의식의 변화를 위해서는 자발적 노동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게바라는 교육이란 “자기 발전의 수단이고, 나아가 사회 발전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매일같이 엄수해야 하는 지속적이고 역동적인 과정”(쿠행223-224)이라고 주장했다. 게바라는 “새로운 사회는 거대한 인민의 잠재력의 개발 이외에는 기댈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마르크스가 새로운 사회는 ‘개인들의 최대한의 발달’을 목표로 하는 사회, 또는 ‘각인의 자유로운 발달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달의 조건이 되는 사회’라고 이야기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심성보는 한국의 정치사회적 국면에서 쿠바교육으로부터 배울 점은 “공적 투자를 아끼지 않는 공교육 강화”(쿠춤161)라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쿠바의 공교육은 청소년을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시민으로 준비시키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다. 소비주의, 자기 중심주의, 개인주의, 경쟁 등을 거부하고, 더욱 이타적이고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비자본적인 사회를 구성하는 인물의 양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

새로운 인간은 애국심뿐 아니라 일/노동의 도덕화를 요구하고 있다. 쿠바혁명의 노동윤리는 일과 서비스에 의식, 평등, 자기희생, 나라사랑, 세계시민의식, 반제국주의, 그리고 혁명에 대한 충성심 등의 가치를 융합하고 있다.”(쿠춤143-144)

심성보가 쓰고 있는 쿠바 교육 환경의 특징은 “지역사회와 학교가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웃, 더 크게는 지역사회가 가족의 사회 자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교육은 “지역에서 서로 돕는 지역사회의 공동책임이라는 원칙 아래 지역주민들은 학교위원회, 학부모위원회, 학부모학교, 공부의 집, 미성년자대책위원회 등 다양한 형태로 교육에 관여하며, 가족, 학교, 그리고 지역사회, 이 3 요소가 함께 하지 않으면 학교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라고 쓰고 있다.

“지식뿐만 아니라 정서나 행동, 신념과 전인적인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쿠춤145-146) “초등학교 교사는 일반적으로 교사들이 학생들을 잘 알 수 있는 장기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처음 4년 동안, 심지어 6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머문다.” “쿠바는 물질적 소비를 별로 하지 않는 사회로서 학교 안과 밖에서 아이들과 교육 및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쿠춤141-142)

배진희가 쿠바의 교사와 학생들의 의견 청취를 통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친구와 서로 도우며 공부하는 것을 익히는 쿠바 학생들에게 ‘경쟁’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일지도 모르겠다”(쿠행15~33)는 견해를 밝힌다. 쿠바 교육에서 ‘경쟁’과 관련하여 심성보는 ‘쿠바에도 경쟁은 존재하지만 한국과 성격이 다르다’는 견해를 밝힌다. “쿠바인들은 공부를 하는 것이 사람을 탈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교양을 익히는 수단이라고 여기고 있다.

물론 쿠바에도 경쟁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급생과 서로 돕기 위해서다. 기회는 평등하지만 급우들이나 학내의 다른 반과 서로 경쟁하는 것이 장려되고 있다. 하지만 경쟁의 성격이 우리와는 약간 다르다. 경쟁은 타인을 발로 차서 떨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와 서로 도우며 자신을 갈고닦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율연구와 자율학습을 결합시킨 상호학습인데, 가장 잘하는 학생이 리더가 되어 성적이 좋지 않은 급우를 지도해서 돌보아주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르쳐주는 쪽이 뻐기는 분위기는 없으며, 배우는 쪽도 그것을 부끄럽다고 생각지 않는다. 상호학습의 장점은 남에게 인정을 베풀면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쿠춤144)

쿠바 에너지 전문가 마리오 알베르토 아라스티아 아비라는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인 에너지 혁명이 필요하지만 여기에는 의식 혁명도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너지 절약 습관을 도입하는 것은 쉽지 않고 시간, 지성, 교육, 노력 그리고 자원이 필요합니다. 분산형의 발전, 효율성, 교육, 에너지 연대 그리고 태양에너지화를 통해 쿠바는 새로운 에너지 패러다임을 찾아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몰쿠34)

그러면서, “새로운 사회정책을 유아기부터 철저히 가르치면 아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가족과 공동체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몰쿠34)고 역설한다. 쿠바의 에너지 절약 프로그램 전문가 테레사 파렌스에라도 “보육원 때부터 시작한다면 그 아이의 인생에 행동의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몰쿠34)라고 설명한다.



ㅣ자기 연주


‘춤’이나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예전엔 꽤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좀 뜸한 것 같다. 지금 당장 내 머리가 떠올리는 ‘춤’ 관련 영화는 나에게 ‘발레’에 관심을 갖게 했던 영화 <빌리 엘리엇>이, 음악 관련 영화는 <브래스트 오프>(직장인 밴드), <아마데우스>(모차르트), <불멸의 연인>(베토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쿠바 재즈), <위플래쉬>가 있다.

그 중에서도 드러머를 꿈꾸는 청년 앤드류의 이야기를 다룬 <위플래쉬Whiplash>가 종종 떠오르는 데에는 플래쳐의 ‘교육 방식’이 있다. 드러머라는 꿈과 음악에 대한 영화임에도 영화 개봉 당시 최고의 밴드를 이끄는 권위자로서 앤드류를 발탁했던 플래쳐의 교육 방식이 화제를 넘어 논란이 된 때문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교육자 자신도 교육 받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만 변한다’ 교육하면 떠오르는 말들이다. 교육 환경과 교육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이겠다. 언제부터인가 교육의 불가능성에 대한 말들이 있지만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듯이 애초에 교육은 만만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이야기임에도 논란이 됐던 것도 교육의 중요성만큼이나 교육에 관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플래쳐는 ‘그만하면 잘했어’라는 말이 최고의 연주자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며 연주자들을 혹독하게 연습시킨다. 악보 없는 연주는 기본이며 자신의 박자가 아니면 무조건 틀린 것이며 연주자들의 사기는 일단 꺾어놓고 본다. 논란이 됐던 지점은 그 혹독함의 정도가 심했다는 것이다. 그 또한 플래쳐의 교육 방식이라고 한다면, 그 혹독함을 이겨냄으로써 뛰어난 연주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겠다. 그 훈련을 이겨낸다면 뛰어난 연주자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플래쳐는 아무에게나 그와 같은 훈련을 시킬 것 같지는 않다. 앤드류가 그만한 재능이 있어 보여서 그를 발탁해서 뛰어난 연주자로 키우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교육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닌 특정 소수에 한정된 교육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플래쳐와 같은 최고의 권위자에게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의 방식대로라면 대부분은 좌절하거나 깊은 상처를 입고 드럼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갈 가능성이 커 보이기도 한다. 그런 교육을 받아야 할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혹독한 교육을 하되, 혹은 혹독한 교육을 통하지 않고도 누구도 좌절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들을 뛰어난 수준에 이르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두를 위한 교육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다. 교육자의 자질의 중요성에 대해, 교육자가 맘껏 교육을 펼칠 수 있는 교육 환경의 뒷받침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빼어난 재능을 가졌던 앤드류도 플래쳐의 교육에 의해 꺽인다. 한데, 그는 좌절을 딛고 최고의 연주를 하게 된다. 그 ‘최고’의 의미는 ‘자기’ 연주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 결과는 부단한 자기 연습이 가져다준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모든 피교육자가 앤드류와 같다면, 스스로 알아서 연습을 해서 뛰어난 수준에 이를 수 있다면 어떤 교육자가 교육하든 교육 환경이 어떠하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앤드류와 같지 않기에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피교육자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교육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교육에 대해, 그러한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육자와 교육 환경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겠다.




2026.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