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레닌과 그람시가 노동조합을 지키려했던 것은 자본권력에게 노동자 헤게모니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였고, 노동자학교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맑스가 협동조합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비판적이었던 것은 개별 노동자들의 노력에 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존재감은 희미하다. 사이토 고헤이는 그 '연합'(어소시에이션)의 의미를 확장해 노동조합, 협동조합, 비영리단체 등을 모두 '연합'하여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Common)에 기반한 '탈성장 코뮤니즘'을 이룰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정희진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노동 운동에 좌절한다면서 "'‘재벌부터 노숙인 까지’ 전 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정치권력을 전취'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의무라고 여기고 만국의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서 '국제노동자협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홍승용은 노동자가 주인인 노동자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한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나는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며 함께하고 있다. 해방을 쓰면서.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l'물려받은 것'으로부터
레닌이 폭로하고 추방해야 한다고 말했던 “혁명적 언사만 늘어놓는 자들”은 기회주의, 사회배외주의, 무정부주의, 프티부르주아, 좌익 공산주의자 등이다. 레닌이 그들을 ‘좌익 소아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혁명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들의 혁명성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에 따른 타협과 유연함’이다. ‘타협과 유연함’은 투쟁의 전략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인류로부터 물려받은 자본주의라는 주어진 현실’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레닌의 혁명에 대한 입장으로 이해한다.
레닌은 ‘국가 폐지’와 ‘의회 거부’를 주장하는 자들을 반혁명적이며 소아병적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레닌은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서도 소아병적이라고 비판한다. 레닌의 주장을 통해 물려받은 기존의 것을 통하여 지양(止揚)해 나가야 하는 것이 ‘혁명적’이라는 레닌의 혁명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 레닌은 역사적으로 물려받은 ‘노동조합’을 거부함으로써 노동조합을 부르주아지에게 바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수불가결한 조직인 노동조합을 반동성 때문에 거부하고 부르주아지에게 바치는 좌익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그러한 반동성과 타협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을 소아병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람시 역시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관료제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하지만 그람시가 노동조합을 비판하는 좀 더 중요한 지점은 레닌과 다르다. 레닌도 노동조합을 ‘공산주의의 학교’로 여긴다. 그람시가 문제 삼는 것은 노동조합이 그런 역할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람시 역시 노동조합을 비판하지만 노동조합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노동자평의회’ 활동을 펼친다. 그런 의미에서 그람시는 노동조합을 거부한다기보다는 노동조합을 보완하려 한다.
레닌과 그람시가 만나는 지점은 ‘물려받은 것(노동조합)’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키는 방식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은 노동조합을 거부하는 자들을 좌익 소아병자라고 비판하고 폭로하며 추방하는 것이다. 그람시 역시 노동조합을 비판하지만 ‘노동자평의회’ 활동을 통해서 계급투쟁을 이끌지 못하는 노동조합의 반동적이고 반혁명적인 성격을 보완하려고 한다.
그람시가 노동조합을 비판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레닌이 지적한 것처럼 ‘대중들을 훈련, 교육, 계몽시켜 새로운 삶으로 끌어들이는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기능을 두려워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전위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람시는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국가’가 가진 것과 같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속성으로 보는 것이다.
레닌과 그람시의 노동조합에 대한 입장은 유사하다. 소중하기에 지켜야 하지만 불가피한 반동성도 인정한다. 그러하기에 노동조합을 지키면서 반동적인 관료주의적인 성격을 대중들과 융합할 수 있는 계급투쟁을 이끌 수 있는 성격의 노동조합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에도 생각이 같다. 그것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의 차이는 레닌은 노동조합 내부에서, 그람시는 노동조합 외부에서 창조하고 확장하려 한다는 데에 있다. ‘창조와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것은 ‘연결’과 ‘협력’이다.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연결의 지점을 찾아가며 협력하는 것이다. 노동조합도 지키면서 계급투쟁을 확장시키는 길이다. ‘새로운 질서’라는 목적이 같다면 그러해야 할 것이고, 그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노동조합도 노동자평의회도 반혁명적이고 반동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이익에 복무한다면 비판해야 할 것이다. 노동조합을 포함한 모든 조직의 관료화가 조직 운영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직 운영에서 발생하는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들에 대한 타협적이고 유연한 대처는 혁명적이기도 하다.
또한, 조직의 운영에서 내부적으로는 절대적인 규율을 따르게 할 권위와 권위에 대한 신뢰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못할 경우 관료화될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다른 조직과 접점을 찾아서 연결하고 협력하겠다는 수용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지 못한 경우 관료화 될 것이다. 레닌의 볼셰비키에게 권위와 신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이 타협과 유연함을 강조한 만큼 다른 조직과의 연결과 협력과 수용에서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자생성과 자치는 권위와 신뢰에 기반 한 조직과 결합할 때 진정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람시의 ‘노동자평의회’가 볼셰비키와 같은 권위를 얻고 신뢰를 이루었는지 의문이다. 그런 의문들을 제기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은 레닌과 그람시가 물려준 인류의 위대한 유산들을 기반으로 ‘지금, 여기’에 맞게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확장해 나가는 일일 것이다.
ㅣ새로운 삶의 질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는 사고는 ‘혁명적’이다. 그렇다면 ‘혁명적이어야’ 한다. 혁명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관계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어야 한다.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만드는 일이라고 여긴다. 자신을, 타인을,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며 또한 변화의 과정 속의 일들을 살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당장 매일 매 순간 새로운 질서를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삶으로써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과 그람시는 ‘새로운 질서’를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지금 없지만 그들이 삶으로 보여준 새로운 질서는 우리에게 남겨졌다. 또한 그들이 말한 것처럼 새로운 질서를 위한 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여긴다. 또한 그들의 말처럼 ‘지금, 여기’에 맞게 혁명은 창조되어야 하고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볼셰비키도, 노동조합도, 노동자평의회도, 국가도, 의회도, 그 무엇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혁명중이고 창조되고 확장되고 있다고 여긴다.
그람시가 만들려고 했던 새로운 질서는 노동자 계급의 자치라는 새로운 삶의 질서이다. 노동자 계급 스스로 자본주의의 질서를 자각하고 자기선택을 통해 자기 삶의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그 질서를 이룰 것이다. 볼셰비키도, 노동조합도, 노동자평의회도 필요하다. 그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협력하여 레닌이 시작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천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람시가 시작했던 노동자 스스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천할 자치의 훈련이 필요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천할 노동자계급의 협력과 자치가 필요하다. 새로운 삶의 질서를 계속 살아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당장 매일 매 순간 자기로부터 이웃과 더불어 볼셰비키와 노동조합과 노동자평의회와 함께 창조하고 확장해야 한다.
러시아 혁명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전쟁 이후의 무정부에 가까운 이탈리아의 현실 속에서 미래 사회를 준비하며 그람시가 던지는 질문들은 ‘프롤레타리아 자치’로 이끌 ‘계급투쟁’을 이끌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여긴다. "어떻게 하면 전쟁이 풀어놓은 거대한 사회적 힘에 다시 고삐를 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힘에 규율을 부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재현될 사회주의 국가의 골격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 갈 잠재력을 가진 그런 정치적 형태를 부과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현재의 긴급한 필요들을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미래를 창조하고 ‘예기’하도록 유용하게 작동하는 그런 방식으로, 현재와 미래가 서로 융합될 수 있을까?"(이전155)
그람시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으로서 그의 글은 러시아 혁명의 열기 속에서 쓰인 것들이고 그러한 열기를 기반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천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라는 새로운 질서를 다져나가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훈련을 위해 쓴 글이다. 그람시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람시가 제시하는 훈련 내용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항시 준비하고 훈련해야 할 내용들이라고 여긴다.
ㅣ국가권력과 어소시에이션
맑스는 ‘발기문’에서 대륙(주로 영국)의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통해 그들이 처한 세 가지 현실에 대해 쓰고 있다. 1848년 혁명 실패 이후 “노동자 운동의 몰락”, 30년에 걸친 투쟁을 통한 “10시간 법 관철”,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평가가 그것이다. 맑스는 ‘협동조합 운동’, ‘협동조합 공장’을 ‘자본의 정치 경제학에 대한 노동의 정치 경제학의 위대한 승리’라고 서술하면서 ‘위대한 실험들의 가치’는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쓰고 있다. 다음과 같은 것을 증명하였다는 것 때문이다.
“대규모로 이루어지며 또 현대과학의 진보와 조화를 이루는 생산은 ‘일손’ 계급을 고용하는 주인 계급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열매를 맺으려면 노동수단이 노동하는 사람 자신을 지배하는 수단이나 노동하는 사람 자신을 혹사시키는 수단으로서 독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노예노동이나 농노노동과 마찬가지로 임금노동 또한 과도적이고 낮은 단계의 사회적 형태일 뿐이며, 자발적인 손과 건전한 정신과 즐거운 마음으로 근로가 수행되는 연합된 노동 앞에서 사라져 버릴 운명이라는 것.”(발11)
맑스는 협동조합 운동이 “1848년에 발명되지는 않았지만 소리 높이 선포되었던 이론에 매우 근접한 실천적 출구”(발11)이며, ‘원칙상 탁월하고 실천 상 유익하다’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판한다. “협동조합식 노동이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적인 노력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제한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나는 독점의 성장을 억제할 수 없으며, 대중을 해방시킬 수 없으며, 심지어 그들의 빈곤이라는 짐을 눈에 띄게 덜어 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발11)
“근로 대중을 해방시키려면 협동조합 제도는 국민적 규모에서의 발전과 국민적 수단에 의한 추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토지귀족들과 자본귀족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독점의 방어와 영구화를 위해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적 특권들을 이용할 것입니다. 노동의 해방을 추진하는 대신에 그들은 그 길에다 자신들의 가능한 모든 장애물들을 실어 나를 것입니다.”(발11-12)
맑스의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비판은 ‘국민적 규모에서의 발전과 국민적 수단에 의한 추진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적인 노력’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협동조합 운동’의 한계는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서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가 ‘얻어야 할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부르주아의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 문제를 비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협동조합 운동’ 자체를 부정한다기 보다는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서도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일 테다.
사이토 고헤이(이하 ‘사이토’로 약칭)는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와 『제로에서 시작하는 자본론』에서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선 ‘탈성장 코뮤니즘’을 구상하는데, 그 실현 방식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커먼common)이며, 실현 주체는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다. 그의 방식과 주체는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적인 노력’이라는 맑스의 문제 제기를 넘어서고 있는가/넘어설 수 있는가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이토는 「국유화보다 어소시에이션이 선행했다」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련에서는 국유화가 먼저 선행되었죠. 반대로 복지국가의 경우, 물상화의 힘을 억제하려는 사회운동이 선행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마르크스는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렀습니다.”“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모두 다 어소시에이션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NGO나 NPO도 해당됩니다. 마르크스가 지향한 것은 소련과 같은 관료 지배 사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민주적 사회였습니다”(제로179)
사이토의 주장을 통해서 맑스가 창립에 관여했던 ‘국제노동자협회’와 사이토의 ‘어소시에이션’의 연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소시에이션이 ‘국가’가 아니라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자발적 상호부조와 연대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국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이나 법적 보호를 받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노동자 정당, NGO, NPO’는 맑스와 사이토의 의미에서는 ‘어소시에이션’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어소시에이션’에 기초한 ‘민주적 사회’를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그에 반하는 국가의 경제 지원과 법적 보호를 받는 ‘어소시에이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국가의 경제 지원과 법적 보호를 받는’ ‘어소시에이션’은 ‘어소시에이션’이 아니라고, ‘자발적 상호부조와 연대’에 기초한 어소시에이션만 어소시에이션으로 인정하면 그뿐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어소시에이션’이 처한 현실이 보여주듯, 현실은 복잡하게 얽히고 설힌 관계를 이루며, 시시각각 변하는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이 가변적인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국가와 무관한 어소시에이션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고, 국가의 지배를 받든, 국가에 대항하든 국가와의 ‘관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소시에이션이 국가 내에서 국가와 관계하면서 국가를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어소시에이션과 국가는 대립 속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모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소시에이션과 국가는 다르기 때문에 갈등의 여지를 지닐 수밖에 없는 관계인 것이다.
해서, 그 양자가 처한 현실은 모순적인 관계를 지양해가는 부단한 운동 속에 존재하는 ‘과정의 현실’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어소시에이션과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도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운동’이라는 개념을 적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부단한 모순의 지양의 운동을 통해서 어소시에이션과 국가권력의 성격을 노동자들에게 민주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의 결과로 주어진 현실을 다시 지양해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사이토가 주장하는 어소시에이션과 복지국가의 ‘물상화 억제의 힘’의 가능성에 대해 필자는 우호적인 입장이다. 다만, 어소시에이션과 복지국가가 지속되기 위해서도 현존하는 자본주의국가권력의 성격을 노동자들에게 민주적으로 바꾸려는 운동을 동시적으로 해 나가야 하지 않은가라는 입장도 가지고 있다.
사이토는 ‘파리코뮌’의 실패 이유를 ‘고립’에서 찾는다. ‘파리와 지방,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 자본주의의 중심부와 주변부, 공동체 간 연결의 결여’가 그것이다.(제로230~232쪽 참조) 또한, 사이토는 ‘복지국가의 한계’를 네 가지로 사유하고 있다. ‘관료지배와 비효율, 남북문제, 수탈과 외부화, 젠더 불평등의 재생산’이 그것이다.(제로190~193쪽 참조)
소련의 실패와 어소시에이션과 복지국가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그리하여 부르주아의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의 사유화’를 넘어선다는 것은, 어소시에이션이 국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를 기초로 한 운동’이 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현존하는 국가권력의 성격을 노동자들에게 민주적인 것으로 지양해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연합Association’의 주체가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인가, ‘지역적’이 아니라 ‘국제적’인가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연대에 기초한 어소시에이션’, ‘일국이 아니라 만국의 노동자들의 단결’이 그 ‘한계’를 넘어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냐, ‘공유화’냐, ‘노동자국가’냐 ‘코뮤니즘’이냐, 혁명이냐 개혁이냐, 계급투쟁이냐 대중투쟁이냐는 이분법을 넘어 그들의 ‘연결’과 ‘결합’과 ‘연대’와 ‘단결’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26. 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