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레닌은 해방을 썼다. 러시아혁명이라는 결과 말고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해방을 썼다. 대중들과 융합하여 진정으로 대중적인, 광범위한 대중화를 이룬 전위 조직을 이끌며, 소수당을 다수당으로 이끌며 해방을 썼다. 소수의 권위주의적인 지도부로 전락하기 쉽다는 점에서 ‘전위’는 문제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전위’의 성격이 문제일 것이다. 아무나 지도부가 되었을 때 그 조직의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평등성과 헌신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전위’는 중요하다. 누구나 지도부가 되어도 좋을 조직보다 누가 지도부가 되든 지도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수 있는 조직이 더 중할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단절
레닌은 “사회배외주의는 기회주의의 완결판”이라고 쓰고 있다. “기회주의가 노동계급 운동 내 부르주아적 정치의 표현이라는 점,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피억압 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소부르주아지의 이익의 표현이라는 점, 부르주아화한 소수의 노동자들이 그들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고 있는 것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쓰고 있다.
레닌이 지적하듯이 배반의 중요한 이유 중에는 ‘경제적 토대’가 있다. “기회주의와 사회배외주의는 동일한 경제적 토대를 갖고 있다. 특권을 갖고 있는 소수의 노동자층과 소부르주아지의 이익이 그러한 토대인데, 이들은 ‘자’국 부르주아지가 타국을 강탈해서 얻는 이윤의 일부 부스러기를 누릴 ‘권리’와 지배 민족으로서의 지위에서 오는 특권을 방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표방하면서 자신이 누리는 ‘경제적 이익’과 ‘특권’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면서 노동자 계급과 사회주의 혁명 운동의 특권층으로 머무는 것은 노동자 계급과 맑스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기만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분열을 야기하며 평등한 사회로 가는 길을 교란시킬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닌이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의 가치를 선명히 하며 그들을 폭로하고 비판하며 추방하는 것은 옳았으며 중요한 투쟁으로 보인다. 그들 소수 노동자 특권층은 늘 배반을 일삼으며 평등의 가치를 깨뜨리며 노동자 계급 내부를 분열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회주의는 ‘성숙하여’ 이제는 노동계급 운동에서 부르주아지의 첩자로서 그 역할을 철저히 수행하고 있다. 오늘날 기회주의자들과의 연합은 노동자계급을 그들 ‘자’국의 부르주아지에 종속시키는 것을 실제로 의미하며, ‘자’국 부르주아지와 동맹하여 타국을 억압하고 강대국의 특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곧 그것은 모든 나라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분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레닌의 사회배외주의자들에 대한 폭로와 비판과 단절은 맑스주의나 사회주의의 중요한 가치인 ‘평등’을 지켜가는 과정이며, 노동자 계급과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막고 ‘내부’를 지켜가는 과정일 것이다. 또한, ‘평등’의 가치를 형성하며 지켜가는 것 그 자체가 사회주의로 가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 ‘내부’를 상하 없이 골고루 평등하게 만들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들도 중요할 것이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 보이는 것은 그러한 ‘평등’의 가치에 대한 논의를 사회 전반에 확장 시키는 일일 것이다.
다니엘 코엔의 시각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외부적 시각’이 점차 사라져 인류 전체가 ‘경제적 이익’과 ‘특권’에 매수당해 불평등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류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노동자 계급, 맑스주의, 사회주의 내부로부터 노동자 계급의 분열을 야기하는 사회배외주의자들과 단절하며 평등한 사회를 향한 투쟁을 펼쳤던 것이다.
ㅣ소수
자본주의 체제에서 제국주의적인 국제 질서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입법도 사법도 행정도 자본주의 국가권력의 편에 선 정치인들과 법조인들과 관료들에게 합법적으로 유리할 뿐이다. 그런 현실에서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다수에게 불평등한 법을 당연한 듯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냉소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공기가 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이유에서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한다며 준법 투쟁이나 평등한 법으로의 개정을 위한 투쟁들을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법 자체가 문제라면 법을 바꾸려는 투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레닌은 맑스주의와 사회주의 내부의 청산주의가 “새로운 혁명을 위한 투쟁의 포기, 비밀 조직 및 비밀 활동의 포기, ‘비합법에 대한 경멸과 조롱, 공화제 슬로건에 대한 조롱 등”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청산파는 자유주의 부르주아 분자들의 지지에 전면적으로 의존했다”고 비판한다. 레닌이 청산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합법성에 대한 굴종’과 그에 따른 ‘대러시아인 지주들과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적 특권 및 이권의 옹호’때문이다.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대중을 조직하고 사회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모든 합법적인 가능성들을−아무리 작은 가능성이라도−활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야 하지만, 합법성에 대한 굴종과는 단절해야 한다.” “청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 대항하여 급진 소부르주아지의 일부와 한 줌의 특권적 노동자층이 ‘자’국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이룬 것이다.”
레닌은 ‘우리 당의 임무’에서 ‘기회주의에 맞선 단호한 투쟁’에 대해서 강조한다.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온갖 종류의 기회주의에 맞선 30년간의 단호한 투쟁이 없었다면 자신의 당을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에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인자들이 존재한다. 처음에 그 숫자가 아무리 작더라도 이들 마르크스주의 인자들을 모아내서 그들의 이름으로 지금 망각된 진정한 사회주의의 약속들을 되살리고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배외주의자들과 단절하여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서도록 요구하는 것, 이것이 시대의 과업이다.”
레닌이 시대의 과업을 통해 맑스주의와 사회주의가 추구했던 사회주의에 이르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곳을 살아본 적도 없고 살아 본 이들의 입장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닌이 쓰고 있는 레닌의 승리를 통해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레닌이 승리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레닌은 승리하기 위해 쓰고 있었고, 승리하며 쓰고 있었고, 승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레닌도 알고 있었듯이 레닌의 승리는 이제 겨우 사회주의의 시작일 뿐이었다.
ㅣ자치
레닌이 러시아혁명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볼셰비키’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는 볼셰비키에 대해 ‘역사의 모든 급박한 사태에 대처하는 만만치 않은 싸움’을 이끌었다고 쓰고 있다. 레닌이 직접 서술하고 있는 ‘볼셰비키가 성공한 근본적인 한 조건’에서 볼셰비키에는 ‘가장 엄격하고 강철 같은 규율’과 ‘사려 깊고 정직하고 헌신적이며 유력한 노동계급 내의 모든 분자들로부터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람시가 언급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체현, 새로운 국가에 의한 지배’를 나타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레닌의 서술에서 ‘새로운 질서’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독재를 이끈 볼셰비키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매일, 매시간’의 ‘끈기, 규율 불요불굴의 정신 및 한결같은 의지를 요구하는 완강하고 필사적인 사활을 건 기나긴 투쟁’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관련하여 그람시가 강조하는 맥락은 레닌과 유사하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여전히 국민국가이며 계급국가다. 경쟁의 기준과 계급투쟁은 변했지만, 경쟁과 계급은 여전히 존재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내외적 방어라는 똑같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고려해야만 하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이다. 마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이미 존재하는 양, 사회주의 국가와 부르주아 국가의 경쟁단계 또는 공산주의 국민경제와 자본주의 국민경제의 무자비한 경쟁단계가 이미 우리 뒤로 지나간 것인 양 행동하고 말한다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치명적인 오류가 될 것이다.”
그람시의 언급에서 눈에 띄는 것도 ‘기나긴 투쟁’의 중요성이다. 그리고 앞서 확인했듯이 그람시는 그 기나긴 투쟁을 이끈 것이 볼셰비키였다고 말한 바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기나긴 투쟁과 관련한 그람시의 위 언급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실천’, 즉, ‘자치(self-government)’를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과 그람시 두 사람 모두 부르주아가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낡은 질서를 ‘새로운 질서’로 바꾸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생각이 같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볼셰비키가 이끌었다는 점, 그런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에도 생각이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낡은 질서를 새로운 질서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기나긴 시간, 그것도 투쟁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 투쟁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고민할 수밖에 없다. 투쟁의 ‘주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가 어떤 형태로든 이루게 될 조직의 ‘운영’의 문제라고 여긴다.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알아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천해 나간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치’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그람시의 말은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자치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 더 깊이 와 닿는다. 그 훈련이 결코 프롤레타리아 스스로 알아서 하기 어려운 훈련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들이 서로 협력할 때 그 훈련이 더 용이하고 협력하는 과정 자체가 그 훈련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는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볼셰비키와 전위 조직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훈련하며 실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람시는 ‘노동자평의회’라는 조직을 통해서 그람시의 말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스스로 하도록 훈련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도 자치를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훈련을 도와 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자치를 위해서도 자치가 가능할 환경이 필요할 것이고 그 환경을 이루는 것에 사람은 필수적이다. 자치에도 규율은 필요할 것이고 규율을 함께 만들고 조정해 나가고 협력하며 지키는 것이 자치이기도 하다. 그렇게 프롤레타리아 각자가 볼셰비키가 되고 전위가 되고 레닌이 되고 그람시가 되어 스스로 독재를 실천할 수 있는 자치의 상태가 되도록 훈련하고 투쟁하고 경험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집권화한 위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천도 자생적인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자치의 실천도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필수조건으로 보인다. ‘위아래’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오히려 문제는 기나긴 투쟁의 과정에서 그러한 조직 내의 ‘위아래’ 혹은 조직들 간의 ‘위아래’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이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 일 것이다. ‘강력한 규율’과 ‘자생성’의 상호작용을 매개해 줄 ‘사람들’에 대해 그람시는 말한다. “러시아혁명은 지금까지 역사가 그 앞길에 뿌려 놓은 모든 장애물들에 대해 승리를 거둬왔다. 혁명은 러시아 민중에게 다른 나라에는 없었던 훌륭한 정치인들을 발굴해 주었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일생을 헌신했던 수천 명의 사람들, 수십 년 간의 망명생활 동안 혁명의 제반 문제를 세밀히 해부하고 분석했던 사람들, 짜리즘에 대항한 힘에 부치는 투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강철같이 단련시켰던 사람들, 유럽, 아시아, 미국 등지에서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 문명과 접촉한 생활을 통해 그들의 책임의식을 명확히 함으로써 제국을 점령한 자의 칼처럼 자신의 의식을 벼렸던 사람들을.”
‘자생성’, ‘자치’는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투쟁 과정에서 ‘중앙집중화’한 조직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오히려 그러한 ‘중앙집중화’를 어떻게 유지하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레닌은 ‘전위’의 역할을 강조한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규율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 규율은 어떻게 검증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강화되는가? 전위의 헌신, 대중들과 융합할 수 있는 능력, 정치 지도력의 올바름이 중요하다. 대중들은 전위를 통해서 자생력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오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은 단번에 생겨날 수 없다. 그것들은 꾸준한 노력과 고난 속에서 얻어진 경험에 의해서만 창출된다. 이들 조건의 창출은 올바른 혁명이론에 의해 촉진되며, 역으로 이 혁명이론은 도그마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으로 대중적인, 진정으로 혁명적인 운동의 실천과 밀접히 연관될 때에만 완전히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레닌은 ‘전위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고 밝힌다. 레닌은 전위만으로 결전을 치르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한다. 광범위한 대중화를 염두에 두었기에 레닌은 ‘위-아래’, ‘지도자-대중’의 분리는 허튼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러시아의 볼셰비크가 “위로부터”인가 아니면 “밑으로부터”인가, 지도자들의 독재인가 아니면 대중들의 독재인가 하는 따위의 이 모든 지껄임을 우스꽝스럽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허튼 소리로, 곧 어떤 사람의 왼쪽 다리와 오른 쪽 팔 중 어느 쪽이 그에게 더 쓸모 있느냐에 대해 토의하는 것과 같은 짓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이분화야말로 새로운 질서를 위한 기나긴 투쟁에서 경계해야 할 일일 것이다. 위아래의 상호작용을 통한 유기적인 결합을 위해 협력해 나가는 데에 자치의 훈련은 필수요건일 것이다.
2026.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