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해방을 쓰기 위해서는 사유를 해야 하고 고정적인 관념에 매몰되어서는 해방을 쓰기는 어렵다. 변증법적 사유는 사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방법으로서의 틀을 고정하지 않는다는 사유 방법이기도 하다. 즉, 변증법이라는 사유 방법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 사유 방법인 셈이다. 사유가 현실의 일부로서 현실을 구성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고정된 사유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현실에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사유는 그와 같은 열린 사유를 통해 다른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해방적 사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단히 변화하는 현실을 따라잡는 개념의 운동을 통해 다른 현실을 가능케 하는 사유는변증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가변적으로 생각하면서
철학을 할 때 아도르노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기준이 있다. 하나는 philosophy다. 필로소피에서 philo는 사랑, 욕구, 뭔가 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 없으면 철학이 안 된다. 그건 생생한 주체의 살아있는 무엇이다. sophy는 지, 지혜 이것은 그냥 제멋대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남들이 봐도 일정한 구성력, 설득력이 있어야, 객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야만 철학이 된다 그런 관점이다.
근데 세계관이라는 건 뭘 하나 정해놓으면 그 틀로 자꾸 본다. 그걸 벗어나는 것을 생각하려고 하거나 추가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그런 걸 넘어서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유주의자 아니냐 하면서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그런 면도 좀 있다. 아도르노는 사고에서 어떤 틀에 박히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문제 제기하는데 그렇다고 제멋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받아들인다.
변증법이 옳기 때문에 가겠다가 아니라 생각을 해보니 변증법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게 옳아! 이렇게 가야 돼! 이런 생각으로 가고있는 게 아니라 옳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그게 변증법인 것이다. 변증법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다 보니 변증법 쪽으로 계속 붙는 것이다. 그런 전통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헤겔에게 그런 면만 있는 게 아니지만 어쨌든 헤겔에 의해서 그런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자유주의자라고 딱 분류해서 서랍에다 넣어버리면 그런 것에 대해서 아도르노는 ‘행정적 사유’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분류하고 끝내면 서로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없다. 아니야 나랑 상관없는 거야. 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자기 성찰도 하고 현실을 가변적으로, 전체 상황들을 가변적으로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 핵심을 짚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ㅣ역사적 사회적 산물
아도르노의 기본에 이런 건 있다. 칸트는 선험적 주체 그러니까 그렇게 인식할 능력을 갖춘 감성 오성 이성을 갖추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인간이라고 선험적인 존재를 상정하는데 아도르노에게 그것은 무의식적인 사회적 주체다.
의식하지 않아도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산물로서의 주체다. 자기가 어떤 사회적 존재라는 걸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미 사회적 주체다. 이런 주장을 한다. 맑스는 그 비슷한 얘기를 또 따로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오감, 내려오는 것은 세계사의 산물이다. 세계사의 업적이다 그런 표현을 한다.
세계사의 산물이 그냥 우리가 오늘날 시각적으로 자명하게 받아들이고 또 내 눈은 당연히 이렇게 보고 귀는 이렇게 듣고 그렇게 보는 눈 그렇게 보는 감각이라는 것 자체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장기 구조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것’을 브로델이 ‘장기 지속 구조’라고 이야기한다. 본성이라고도 표현한다. 인간의 본성 또는 유적 존재 등등 그 개념들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다. 그걸 의식하지 않을 뿐이지 사실은 사회적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게 무슨 초역사적인 선험적인 그런 게 아니라고 한다. 유전의 결과물일 뿐이고 시간 공간이라는 객관적인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가변적이지만 칸트주의에 대해서는 유물론 쪽에서는 부분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ㅣ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사태 자체를 강조하는 이유가 내재 비판과 연관이 있다. 전략을 짜려고 해도 사태를 파악해야 하고 사태 자체를 면밀히 봐야 한다. 그렇게 보다 보면, 제대로 현실을 파악하면 어떤 전략이라든지 새로운 대안이 나온다고 얘기할 수 있다.
레닌은 진실 또는 이론에 근거해서 전략을 찾았다. 반대로 스탈린은 전략에 근거해서 진리를 만들었다. 어느 쪽이 합당하냐 했을 때 레닌이 합당하다는 사람도 있고 스탈린이 더 맞지 않냐 이런 사람도 있다.
전략은 우리가 ‘목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목표 의식과 거기에 들어가는 수단들을 고려해서 이론은 따라가는 것 아니냐. 그래서 니체주의적인 원근법적 사고, 담론이 힘이고, 권력이라고 하는, 푸코 등등의 틀들이 스탈린주의 하고 뭐가 다르냐. 주체 역할을 그만큼 강조하는 것 아니냐. 물을 수도 있다.
변증법이 이른바 실증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한다면서 사실은 실증주의에 빠지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주체가 적극적으로 투쟁해서 없는 걸 있게 만드는 그 투쟁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물을 수 있다.
지젝 같은 경우가 그쪽이다. 없는 게 있게 되는 것도, 그러니까 유토피아 좋다 가자 한다고 해서 가지는 건 아니다. 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갈 수 있는 힘, 일종의 무기다.
가능성이다. 그냥 주의주의로 가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또 주의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어져도 항상 대세만 따르게 되는, 잘못하면 기존에 있는 조건이 다 갖춰져야만 뭘 하겠다고 드는 것도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2026. 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