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35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들려주었던 자본주의와의 러브스토리도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나 싶다. 인류가 피땀 흘려 발전시켜온 역사적 과정으로서 자본주의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노예제나 봉건제에서처럼 신분에 따라 계급에 따라 사랑의 모양이 평등할 수 없다는 것이 <자본주의: 러브스토리>의 비극일 것이다. 사회적 약자라는 신분, 노동자라는 계급으로 태어난 이들에게는 애초에 자본주의와의 만남은 만나지 말았어야 할 잘못된 만남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주어진 운명이라면 사랑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 사랑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 사랑과 함께 비극적 결말을 맞지 않기 위해서, 그 사랑을 품고 다음 사랑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다음은 사회주의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자본주의: 러브스토리


[볼링 포 콜럼바인], [화씨 9.11], [식코]를 연출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자본주의(Capitalism)]의 부제는 ‘러브스토리(A Love Story)’이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자본주의와의 사랑을 ‘불장난(a big love affair with capitalism)’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의 실체에서 찾을 수 있다. 감독에게 자본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며 절대 다수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체제이다. 미국은 상위 1퍼센트의 소수가 하위 95퍼센트를 더한 것보다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자본국가권력은 다수의 이익을 무시한 채 부자감세, 기업 탈규제와 같은 소수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내놓고, 부자들을 위해 서민들의 세금을 아낌없이 쓴다.

자본주의 국가권력은 국민들의 집을 담보로 혹은 미래의 노동을 담보로, 평생 빚쟁이라는 노예적인 삶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 폭리를 취한다. 경영실수로 위기에 처한 대기업들은 서민들이 낸 세금으로 구제를 해 준다. 정부와 언론은 서민들이 길에 나앉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대기업이 망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망하는 것이라고 광고하며 공포를 조장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와 불장난에 빠져 경제적인 이윤추구를 삶의 지상목표로 삼는 가운데 우리의 삶은 황폐해져 간다고 감독은 지적한다.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남의 불행은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국민들은 자신들의 삶을 착취하는 부자정당을 지지한다. 국가는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부추긴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상위 1%에 낄 수 있다고,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그렇지 못한 인간들은 게으른 인간일 뿐이라고, 오히려 자신들의 무능력을 탓하게 만든다. 국가의 부추김 속에서 국민들은 투표소나 광장에서 모두가 부자 되는 세상을 위해서 함께 싸우기 보다는 자기계발이나 부업을 통해서 1%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과 환상을 키우며 살아간다.

무어는 자본주의와의 불장난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민주적으로 운영하면서도 눈부시게 성장하는 회사들을 보여준다. 로봇을 생산하는 위스콘신 매디슨의 ‘이스머스' 엔지니어링 회사는 모든 직원이 동등하게 한 표의 결정권을 갖는다. 캘리포니아의 제빵 회사는 회장부터 말단 직공까지 매출이익을 똑같이 나눈다. 이들 회사에서는 ‘주인의식'의 부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다. 실제로 모두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보여주는 또 다른 가능성은 1937년 무어의 고향인 미시건 플린트에서 있었던 파업사건이다. GM자동차 노동자들은 회사 건물에서 44일간 농성을 벌였다. 사측은 경찰을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구사대'를 고용해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결국 파업은 노동자의 승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ㅣ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


1912년 미국의 메사추세스주의 로렌스 지방에서 가혹한 조건 속에서 노동하는 여성들의 파업과 승리를 밑거름으로 만들어진 영화답게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는 미국 LA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멕시코 이주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과 승리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녀들의 승리 못지않게 중요한 감독의 고민이 담겨 있다.

두 명의 여성노동자 로사와 마야는 인권운동가인 샘을 통해 비로소 그들이 노사협상도 없이 임금은 갈취당하고 의료보험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인간다움과 행복을 보장해 줄 ‘빵과 장미'를 얻기 위해 조합원이 되어 함께할 것을 요구하는 샘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상반된다. 언니 로사는 함께 모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해고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기에 샘을 내쫓으려하고, 동생 마야는 아차하면 해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샘의 말을 들으려고 한다. 해고의 두려움 때문에 함께할 것을 거부하는 로사, 똑같은 이유로 적극적으로 함께하려는 마야. 샘, 그리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회사로부터 그들의 빵과 장미인 임금인상과 의료보험, 휴가를 지켜내기 위해 시위에 나서는 마야, 반면 회사로부터 임금인상뿐만 아니라 안락한 직장생활을 보장받으며 동료인 시위주동자들을 밀고하는 로사.

[자유로운 세계]에서도 감독의 고민은 계속된다.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착취 당한대로 착취하게 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30대 싱글맘이며 성희롱에 반발했다가 직장에서 쫓겨난 앤지는 더 이상 착취당하면서 살지 않겠다며 창업을 하여 고용주가 되지만 그녀 역시 자신들이 착취당했던 방식과 똑 같은 방식으로 불법 이주자라는 약점을 이용해서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게 된다. 감독은 경영자든 노동자든 착취관계 속에서 인간의 삶이 황폐해져 갈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를 보여주고 있다. 아들과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 이주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앤지를 보며 아버지는 말한다. “너희 둘만 잘 살면 되는 거니?” 앤지는 말한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

헤게모니를 쥔 이데올로기 좌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두 감독의 분석에서 우선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노동자들의 진행형으로서의 투쟁과 승리의 역사이다. 더불어 그러한 역사를 새롭게 그려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두 감독 자체가 이미 희망이기도 하다. 좀 더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부자정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사로잡힌 욕망과 자본권력의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치적 상품화’로 인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두려움과 ‘별 매력 못 느낌’에 대한 감독들의 고민, 좀 더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경제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정작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하거나 함께 하면서도 개별화되어가는 노동자들의 사물화된 태도에 대한 고민이다. 그 고민은 다름 아니라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라는 앤지의 말처럼, 남들과 다르게 살지 않으면서 남들처럼, 남들과 함께 나누면서 살기 위한 길에 대한 고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고민은 계급투쟁과 함께 계급투쟁 내부 혹은 외부의 존재들 간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이클 무어 감독과 켄 로치 감독은 여전히 노동조합, 즉, “노동자들의 단결” 속에서 희망을 보고 있지만, 한편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그러한 사물화된 태도를 야기하는 원인이 자본국가권력이라는 점에서 자본국가권력이 야기하는 욕망과 환상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한편으로 좌파 이데올로그들의 태도나 노동자들, 혹은 그들을 이끌어 나가는 주체들의 태도 또한 되돌아 볼 문제임에 틀림없다.



ㅣ‘사라지는 매개자’ 되기


지젝은 레닌의 말을 빌어 주저 없이 개입할 것을 요구한다. “과감하게 도약하라. 기회를 붙들고 주저 없이 개입하라, 비록 상황이 ‘설익은’ 것이라 해도 말이다. 이 ‘설익은’ 개입이 ‘객관적’ 역관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고, 그 안에서 최초의 상황은 ‘충분히 무르익은’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쪽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 − 그것은 우리에게 상황이 ‘설익었다’고 말하는 주장의 준거가 되는 바로 그 표준 자체를 뒤엎게 될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개입하라는, ‘실패를 실패하라’는 지젝의 개입 앞에서 주체들은 조심스럽고, 두렵다. 그러한 과감한 도약을 이룰 수 있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동력은 뭘까? 노동자들의 혁명적인 잠재력을 조직할 수 있는, 노동자들과의 약속을 저 버리지 않는, 노동자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 진정한 지도력? ‘사라지는 매개자’를 떠 올려볼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되기, 혹은 개입과 결단의 역사적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있는 것에 대한 엄격한 분석’이라는 지난한 인식적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사라지는 매개자’는 역사적 혁명, 사회주의 혁명을 추동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만, 혁명이 그러하듯 결코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멀리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결단하는 주체, ‘사라지는 매개자’로서의 주체이다.

그 주체는 결코 영웅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는 불의와 정의를 판단할 줄 아는 판단력도 있고,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용기도 있고,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끈기도 있지만, 그는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소신껏 발휘한 것뿐이다. 누구나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2026.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