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36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제 새끼 귀하면 남의 새끼 귀한 줄도 알아야 사람”(이웃집 할매)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정희진 여성학자) 내가 아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쓴 아름다운 문장들은 참으로 많다. 그중에서 최근에 해방을 쓰고 있는 나에게 해방 세상을 위해서 가장 가까이 느껴지는 의미심장한 문장들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오래 전부터 누구나 말해 왔다는 점에서 그렇게 새로울 것도 없는 문장들이다. 그럼에도 해방을 쓰고 있는 나에게 자꾸만 생각나는 이유는 미래 세대라고 불리는 어린 아이들에 대한 생각 때문인 듯 싶다. 지금 어린 아이들에게 미래는 있는가. 어떤 미래를 말할 수 있는가. 나에게 묻다 보니 저 문장들이 자꾸 생각나는가 보다. 내가 직접 미래 세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난 시간의 고통을 살아낸 할매 할배 세대들의 삶에 애정을 가지며 그들과 함께 미래 세대를 살아갈 새끼들을 귀하게 여겨줄 수 있는 해방 세상을 연구하고 글로 쓰는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사는 게 장난이 아니란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는 말은 ‘생각 없이 한 행동이나 말로 인해 누군가가 예상치 못하게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말이나 행동을 하기도 한다. 마음속에 담아 두고 수시로 꺼내 몸에 새겨야 할 말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말이나 행동은 삼가야겠지만 기쁨과 위안을 줄 말이나 행동을 고심하기도 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니 어려울 것도 없어 보인다.

무심코 돌을 던지는 누군가의 위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누군가들이 맞을 피해는 더욱 커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일 것이다.

어린 시절, 어른들의 잔소리처럼 들리곤 하던 이야기들이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가면서 그들이 경험했던 세상을 만나게 된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누군가의 생각 없이 던진 말이나 행동에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누군가들,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누군가들은 죽을 만큼 힘든 삶을 맞게 된다는 경험도 하게 된다.

새해가 되면, 인사 드린다며 삼삼오오 찾아 뵙던 우리에게 먼저 세상을 살아낸 어른들께서 정성껏 차린 맛깔난 음식들을 내어주시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들려주시던 말씀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애들아, 늘 말과 행동을 조심하거라. 사는 게 장난이 아니란다’



ㅣ내가 살아가는 삶은


삶이 세상이 거짓이나 해악 투성이어서 진실이나 선함이 불편하거나 심지어 위선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삶이 세상이 늘 진실되거나 선하지만은 않기 때문에, 진실되거나 선하게만 살고 싶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삶도 세상도 늘 거짓이나 해악에 얽힌 채 살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실재하는 진실 때문에 나는 안 그런데라며 억울해하기도 하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 위안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도 모르게 거짓과 해악의 세상에 동조하는 것 같은 죄스러움에 진실되고 선하게만 살아가는 것만 같은 사람들이 불편하거나 위선적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혹은, 진실되고 선하기만 한 세상은 오히려 거짓이라고 여기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 세상모르는 아이들은 모르겠으나 세상 좀 살아본 어른들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런 것 같다. 우리네 삶은 세상은 거짓과 해악만 있는 것도, 진실과 선함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짓과 해악이 진실과 선함을 이기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는 것이 내버려 두어지지도 않는 것이 삶이고 세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삶은 세상은 완전할 수 없기에 완전하려 하고, 다다를 수 없는 곳에 다다르려 하고, 가질 수 없기에 가지려고 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려 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려 하는, 그런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위선과 위악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시기와 질투와 음모와 배신과 복수와 전쟁이야말로 살아 있음을 증거 하는 인간적인 것이라고, 그것이 인간적인 사랑을 진실을 선함을 이루는 동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삶은 세상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그 선택의 결과가 49:51인 세상이야말로, 진실되지만도 거짓되지만도, 선하지만도 악하지만도 않을 수 있는, 참과 거짓의, 선과 악의 그 간극이 최소화된 그런 세상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아니더라도, 신이 아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상태가 아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삶은 늘 그 어느 쪽도 아닌 조금 모자라는 쪽, 조금 약한 쪽을 선택하는 삶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나에게는 사랑이고 진실이고 선함일 수도 있겠다. 그마저도 누군가에게는 위선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위악적이지 못한 심성의 표현, 위악적이고는 싶지 않은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ㅣ오해와 믿음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결국 내게 주어진 행운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서로의 이해가 오해였음을 깨닫지 않아도 좋았다는 것”(박민규, 2009)

나는 박민규 작가의 이야기를 이렇게 읽어본다. ‘모든 소망은 믿음이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소망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좋은 쪽으로 믿은 사람들이라고.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 믿음 때문이었음을 깨닫지 않아도 좋았다는 것.’

사랑에 대한 오해는 사랑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오해라도 하고 싶은 것이리라. 오해를 이해로 믿고 싶은 것이리라. 이미 사랑에 빠진 그들의 오해를 이해시키려는 이가 있다면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들의 오해를 좋은 쪽으로 이해해 주는 것, 부디 그들이 이해인 듯 이해 아닌 이해 같은 오해로 사랑을 이루기를 바라며 그들의 오해에 공감해 주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오해를 이해하는 방식일 수 있을 것이다.

소망에 대한 믿음은 소망을 이루고 싶은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리라. 이미 소망하는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는 이가 있다면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들의 소망을 좋은 쪽으로 믿어주는 것이 부디 그들이 과학인 듯 과학 아닌 과학 같은 믿음으로 소망을 이루기를 바라며 그들의 소망을 과학적으로 믿어주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믿음을 과학 해주는 방식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소망을 이루려는 이에게는 상대와 현실에 대한 이해가 중요할 것이다. 이해가 부족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이해는 늘 부족할 것이기에 오해는 늘 생길 것이다. 상대와 현실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되겠지만 믿는 만큼 이해의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상대와 현실을 수용하며 존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대는 자신과 다르기에, 현실과 이해는 다르기에 현실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고 존중을 통해 상대와 현실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거나 동의하거나 갈등하거나 설득하거나 타협하거나 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게만큼은 절대적으로 옳은 자신의 이해를 강요하는 것은 상대와 현실에 대한 존중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자기 이해의 강요로 인해 상대와 현실에 대한 오해는 늘 생길 수 있는 것이고 오해는 풀리지 않을 수도 있고 풀지 못할 수도 있다. 오해는 상대나 현실과 무관한 자신만의 이해에서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괜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확인되지도 않은 오해’에 대해서 오해했다고 오해하는 것은 확인되기 전까지의 오해일 뿐일 것이다. 상대나 현실을 이해하려 노력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오해로 괜히 오해하지 않는 것도 상대와 현실에 대한 존중과 믿음을 키워줄 것이다.

‘정치‧경제‧인간적으로 평등해서 인간들이 자유롭게 서로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상태’를 나는 사랑하며 소망한다. 그런 소망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이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그런 사랑과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해된 것만을 사랑하고 소망하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랑과 소망의 불가능성이 이해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설사 이해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사랑과 소망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과 소망은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이고 소망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사랑과 소망의 원인과 결과에 관계없이 사랑하고 소망하게 되는 것이 사랑과 소망일 것이다.

얼마든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오해할 수도 있고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한 이해는 늘 필요하겠지만 그런 것과 관계없이 사랑과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은 중요하다. 믿음은 현실을 넘어서거나 사랑과 소망을 이루기 위한 현실을 만들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도 소망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삶의 진리는 이토록 단순한 것이 아닌가. 험난하고 복잡한 것이 삶일지라도 말이다. 때론 노래하며 함께 웃으며 걸어가는 것이 삶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2026.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