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역사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미디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들에 대해 스스로 답하려 애쓰는 것은 해방을 쓰기 위한 해방 세상을 살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에의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권위자들의 답을 참고하더라도 스스로 묻고 답하는 생활습관을 갖는 것은 해방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것은 권위자들이 권력이 되지 못하도록, 권력이 되어 자본에 굴종하지 못하도록, 다만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물음의 주권자, 해답의 주권자, 해방의 주권자가 되어갈 필요가 있겠다. 그것이 해방의 조건을 만드는 길이기도 하겠다. 그것이 역사란, 국가란, 정치란, 정의란, 미디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아우슈비츠
인류의 야만이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다시는 그와 같은 야만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원인’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우슈비츠가 이윤증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상품화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노동하지 못하면 ‘해충’ 취급받다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자원 수탈을 위해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자본의 논리, 제국의 질서, 제국적 자본주의가 갈 데까지 간, ‘자본의 끝’이라는 해석에 동의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자본의 논리, 제국의 질서에 기생하는 정치 권력의 정경유착, 민족과 애국의 이름으로 국민들을 선동하며 분열과 혐오를 조장하는 파시즘 정치, 지배와 복종을 당연시하는 가부장주의 및 권위주의 문화의 일상화가 그 원인이라는 해석에도 동의할 수 있다.
오늘날 그들 원인 중 어느 것이 우선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어느 하나의 원인만 해소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없을 만큼, 제국적 질서와 파시즘 정치와 권위주의적 문화가 일상화되었다는 해석에도 동의할 수 있다.
지구의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아우슈비츠’의 극복을 위해 그 모든 원인에 대해 더 일상적으로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해석에도 동의할 수 있다.
ㅣ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각자가 자신에게 해야 할 이 물음이야말로 의미 있어 보인다. 그 물음에 따라 자신이 살고 싶은 사회에서 살아갈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현실 개입을 통해 바라는 사회를 실현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는 사회를 실현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이 현실의 변화에 따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달라진 현실에 맞춰 또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그 물음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는 사회의 실현 여부보다 더 의미 있어 보인다.
그 물음으로부터 현재 어떤 사회인가에 대한 인식을 통해 자신이 살고 싶은 사회를 그리며 실현해 가게 될 것이다. 인식한 현실이 어떤 사회이든, 실현된 사회가 어떤 사회이든 그 사회를 토대로 자신이 살고 싶은 사회로 끊임없이 변화시켜 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의미 있어 보인다.
맑스와 엥겔스가 150여 년 전에 연구를 통해 제시한 오래된 미래인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 그들의 연구를 이어받은 ‘탈성장 코뮤니즘’(사이토 고헤이)이나 ‘풍요로운 평등사회’(홍승용)를 구현하려는 바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 하는 상태로부터 시작해서 좀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의식적으로’ 실현한 만큼의 사회를 살게 될 것이다.
쿠바인들 역시 자신들이 살고 싶은 사회를 실현해 왔다. 그들이 지향하며 만들어 온 평등한 사회의 모습에서 ‘독점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국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며 의료·교육·주택의 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습은 의미 있어 보인다. 그 보다 그들 사회에서 더 의미 있어 보이는 것들은 쿠바인들이 자신들이 살고 싶은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서 간 자들을 참조하지만 추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쿠바의 길’을 가고 있다”, “복지와 인권에 대한 이상을 심각한 경제위기의 와중에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실현하고자 했던 세상은 단순히 경제 체제의 변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부와 소득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인간이 소외에서 벗어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었다”, “새로운 사회는 거대한 인민의 잠재력의 개발 이외에는 기댈 것이 없다”, “혁명 과정을 통해 자신들을 변화시켜 나갈 것이고, 이것이 또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각종 제도들과 사회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웃, 더 크게는 지역사회가 가족의 사회 자본에 영향을 미친다”, “경쟁은 타인을 발로 차서 떨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와 서로 도우며 자신을 갈고닦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인 에너지 혁명이 필요하지만 여기에는 의식 혁명도 뒤따라야 한다”, “새로운 사회정책을 유아기부터 철저히 가르치면 아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가족과 공동체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보육원 때부터 시작한다면 그 아이의 인생에 행동의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으며, 쓰면 쓸수록 많아지고 늘어나는 개인들이 관계를 통해 만들어낸 자본, 그 ‘사회 자본’을 누리며 살아간다”, “주택문제에 대해 직업, 식량, 건강, 교육이 연결되어 있다는 ‘포괄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오직 참여민주주의, 즉 민중이 나라의 정치적ㆍ경제적 사안들에 일상적으로 꾸준히 개입하는 것만이 민주주의를 보장한다”, “‘계속되는’ 특징, ‘창조적이지 않고 상상력 없는 것에 반대되는 ‘혁신성’, ‘자신들 나름대로 생각하는’ ‘쿠바니아’를 제2의 천성으로 삼고 있다”, “모든 쿠바인은 정치가가 아니라도 어떤 경로로든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중앙혁명정권이라고 하는 권위를 가지면서 지방분권화로 주민자치를 진행하고 있다”, “워크숍의 구성원들은 지역과 친숙한 이들이기 때문에 그곳 주민들이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는 과제들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쌓아간다”. “맨 밑바닥에서부터 토론 문화를 소중히 키워나간다”,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채택한 범주들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큰 관심사 중 하나다.”
쿠바인들이 살며 채워온 시간과 공간은 우리와 다르지만 낯설지만은 않다. 우리가 그들처럼 살아야 할 이유도 그들처럼 살지 말란 법도 없다. 쿠바인들만 아니라 지구의 또 다른 그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어떻게 지구의 시공간을 채워갈 것인지 어떤 생산방식. 어떤 국가. 어떤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공통의 관심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삶은 하나의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지, ‘살고 싶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부터 다시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위기’와 ‘전환’의 시대라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늘 그렇지 않았나. 늘 변화하고 있지 않나.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는 ‘우리’의 몫일 수밖에 없지 않나. 오직 우리의 힘과 분투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두 가지를 얻게 될 것이다. 쟁취한 그것과 새로운 것을 쟁취할 가능성의 존재인 자기 자신을.
ㅣ지배 하지도 지배당하지도
헤로도토스는 “행복이란 덧없는 것임을 안다”(1권)고 말한다. 남의 것을 빼앗아 부와 권력을 이루는 행복의 운명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전에는 강력했던 수많은 도시가 미약해지고, 내 시대에 위대한 도시들이 전에는 미약했다.”(1권)는 것이 빼앗는 자들이 마주할 행복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헤로도토스 자신이 경험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통한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에는 수많은 다른 민족과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자고 제안했던 이에게 퀴로스 왕이 했던 “지배 민족에게 피지배 민족이 될 각오를 하라”(9권)는 경고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 경고에 따라 어떤 페르시아인들은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 살며 지배자가 되기”(9권)를 선택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전쟁을 선택했다.
빼앗고 빼앗기는 전쟁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빼앗는 행복을 덧없는 것으로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아르타바노스는 그리스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크세르크세스에게 신중하라는 조언을 한다. “인간은 상황의 지배를 받는 것이지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7권)라는 말과 함께. 아르타바노스의 지혜는 현실을 전체적으로 볼 줄 아는 혜안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냉철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른 판단을 한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기보다 기존에 하던 대로 행동하거나 자신의 의지에 기대어 행동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상황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아르타바노스는 크세르크세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 것이다. 그럴 경우 대개 상황에 적합한 행동에 실패하게 된다. 신중론을 펼치는 아르타바노스에게 크세르크세스는 소심하지 말고 대범하라며 위험을 감수해야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소심해서는 어떠한 행동도 주저하게 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경솔한 행동은 우를 범하기 마련이라는 것 또한 맞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행동을 하게 되는 순간은 찾아오게 마련이며, 그 행동의 적절함은 주어진 상황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파악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 온몸을 던지는 판단을 통할 때 자신이 바라는 상황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르타바노스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지혜는 상대적으로는 모든 입장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그중에서 더 적합한 상황 판단과 행동을 못하게 만드는 상대주의로부터 멀리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소중해 보인다.
소아시아 메디아의 왕 데케이오스는 그 어떤 왕 보다도 훌륭해 보였다. 메디아를 정의롭게 다스렸고 다른 민족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헤로도토스가 그리스인들에게 조공을 강요하고 지배를 일삼았던 최초의 인물로 언급한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 대비되기도 한다. 그 두 왕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권력욕의 차이일까. 아니면 그들 민족의 관습의 차이일까. 스스로 건강한 민족이라면 침략하거나 침략당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침략하지 않고 서로 도우며 살았던 역사가 존재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자유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의 달콤함을 알지 못한다.”(6권) 그리스의 자유민이 페르시아인에게 했던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리스의 자유민 들은 자신들이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 타인에 대한 억압을 통해 자신들이 자유의 달콤함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다. 그리스 시대의 자유민들, 오늘날 ‘자유주의자’라고 불리는 어떤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억압받는 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참주제를 넘어 제한적으로나마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것이 그리스 민주제의 의의라고 한다면, 노예제가 존재했고 여성참정권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 의한 인간에 대한 차별과 억압. 2,500년 전과 오늘을 단순히 비교할 수 없다. 다만, 얼마나 나아졌는가라는 물음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물음일 것이다.
자유, 인권, 평등, 차별철폐, 불평등 해소. 무엇이라 부르든 그러한 가치들은 부단히 요구하고 쟁취할 때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며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고 확장되어도 좋은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차별 및 인권에 대한 교육, 차별적인 제도들을 부단히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과 제도의 개선을 위해서도 “정치·경제적 불평등”이 우선적으로 해소되어야 한다. “정치·경제적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즉 인간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물건처럼 수량화·상품화하여 값을 매기고 도구처럼 이용하는 자본 중심 구조와 야만적인 권력이 존속하는 한, 생계를 위해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노예화”나 여성들이 性을 팔도록 내몰리는 “성매매”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치·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해소를 위해서 민주제든 또 다른 형태의 제도든 제도를 운영하는 이들(정치인 및 관료들)이 필요하고 선출할 수밖에 없다면, 거의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선거제도”에 대한 관심은 중요하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의 원인을 밝히려 했다. 그것은 누구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탐구였다. 소아시아 뤼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최초로 그리스인들에게 조공을 강요하고 지배를 했다는 점, 그리스 식민도시인 아리스타고라스의 권력욕, 이오니아인들의 참주제에 맞선 반란 등이 헤로도토스가 밝히는 페르시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이야기하려는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왕들과 귀족들, 즉 상류층들의 권력에 대한 지나친 욕심, “탐욕”이라고 할 수 있다.
탐욕스러운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민주제는 탐욕을 막을 장치임에 틀림없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제는 그러한 견제 장치로서 제한적이지만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의 민주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민주제 내에서도 권력투쟁은 끊이지 않은 것이다. 제도라는 것은 꼭 필요한 장치이다. 그래서 그 장치를 운영하는 인간들이 어떠한가라는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탐욕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들이 어떠한가를 규정하는 삶의 양식(樣式), 즉,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행복한 문화가 사회 전반에 흐르도록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부단한 성찰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정치·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제도들이 마련될 것이고, 개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찾을 줄 아는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으면서’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날 것이다.
자아와 세계를 성찰할 줄 아는 인식의 힘을 키우는 것은 자유인이 되기 위한 밑거름이다. 고전을 읽으며 스스로 자신이 바라는 삶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그 밑거름을 다지는 시작이다.
2026.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