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제 새끼 귀하면 남의 새끼 귀한 줄도 알아야 사람”이라는 이웃집 할매의 애정 넘치는 말씀이 상식이던 시대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릴 수도 있는 것이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상식이기도 하다. 경제발전으로 할매 시대보다 절대 빈곤은 줄고 상대적 빈곤이 극심해지고 있다는 것도 자본주의 발전 모순에 따른 상식에 속한다. 극단적인 경제 양극화가 상식이 되는 시대로 갈 것인지, 그 격차를 줄여 절대 부가 상승하는 시대로 갈 것인지 기로에 서 있다는 것도 사회적 의지에 따른 상식에 속하기도 한다.
할매 시대와 달리 지금은 제 새끼도 아껴주기 힘들거나 제 새끼만 아끼는 가운데 사회적 애정 결핍이 애정에 대한 과잉을, 사회적 애정 과잉이 애정에 대한 결핍을 낳고 있는 것도 같다. 경제 양극화가 애정 양극화를 낳는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애정이 경제 양극화를 해소할 것이라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경제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서 이웃에 대한 애정과 생산방식의 민주화가 상호작용, 상호침투, 상호보완하는 가운데 풍요로운 평등 세상의 구조를 맞춰가는 것이겠다. 그럴 때 기본적인 것들을 갖춰가는 것이 상식적이기도 하겠다. ““‘재벌부터 노숙인까지’ 전인구가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며 정규직인 세상”(정희진 여성학자)도 애정 넘치는 기본들 중 하나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소통을 통해서 형성할 수도
한국에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연장하기 위해서 국민들을 살해한 대통령들이 있었다. 그들이 국민들을 살해했지만 정치를 잘했다거나 경제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들을 찬양하는 국민들이 있다. 그 국민들은 정치를 잘하기 위해서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대통령이 국민들을 살해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겠다.
나는 그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대통령이나 독재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들을 권력을 위해서 국민들을 살해한 살인자들로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대통령이 국민들을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잘했다거나 경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찬양하는 국민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를 잘하기 위해서 경제 성장을 위해서 대통령이 국민들을 살해할 수도 있다.” 나는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된다. 역사의식이나 윤리의식을 말하기 이전에 나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고 있다. 나의 상식이 부족한 것인지 돌아보고 있다.
정치를 정말 잘 했느냐, 경제 성장을 정말 이루었느냐,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역사인식일 뿐이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들을 살해해도 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그래도 되는 상황이 있는 것인지 국민들을 살해해서라도 정치를 잘하고 경제성장을 이루면 찬양받아도 되는 것인지 돌아보고 있다.
상식은 무엇이며, 기본은 무엇인가. 현재 전 지구적인 상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극단적 이익의 시대’라는 상태, 오직 자국의, 혹은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상태는, 인류에게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상태 아닌가 싶다.
2,500여 년 전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서술하고 있는 인류의 상태 이후 그 정도와 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늘 존재했던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상태 아니냐는 것이다.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인간들을 살해하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온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상태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류의 역사에서 그와 같은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상태가 상식적이고 기본적이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들의 ‘소통’이 있지 않았냐는 것이다.
ㅣ유토피아와 과학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몰락의 필연성을 서술하는 것’, ‘계속 은폐되어 있었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내적 성격을 벌거벗기는 것.’ 엥겔스가 쓰고 있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가 발전해 가는 과정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역사 파악,’ ‘잉여 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의 폭로’를 통해서 사회주의가 과학으로 발전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쓰고 있다.
엥겔스는 세 사람의 위대한 유토피아주의자들을 통해서 유토피아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분한다. “프롤레타리아적 경향과 함께 일정 정도 부르주아적 경향도 지니고 있었던” 생-시몽과 푸리에,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한 나라에서 살면서 이 자본주의적 생산이 산출한 대립들에 영향을 받아 계급 차이를 철폐하기 위한 자신의 제안들의 모범을 직접적으로 프랑스 유물론에서 찾아 체계적으로 전개한” 오언이 그들이다. 엥겔스는 그들 세 사람을 ‘이성과 정의’의 왕국을 인식할만한 천재적인 인물들이라고 쓰고 있다.
그럼에도, 엥겔스가 그들을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엥겔스가 주장하는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에 있다. 엥겔스에 따르면 이 세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점은, “그들이 역사적으로 산출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의 대표자로서 행동하지 않았다”(과학 435)는 점, 또한, 그들은 “특정 계급을 우선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즉시 인류 전체를 해방시키려 했다”(과학 435)는 점에서 유토피아주의자라는 것이다.
엥겔스의 주장에서처럼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속임수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또한, ‘인류 전체’를 해방하겠다는 것이 최종 목적지일 수는 있겠으나 그곳으로 가는 방법으로는 ‘특정 계급’을 우선 해방시키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며 목적지에 이를 가능성도 클 것이다.
그리고, ‘특정 계급’ 내에서도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이익의 대표자로 행동하는’ 자들, ‘인류 전체’ 이전에 ‘특정 계급’을 우선 해방시키려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로부터 ‘계급 해방’을 이루어가는 것이 효과적이고 가능성이 높은 방법일 것이다.
'생산방식’이라는 토대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와 같은 생산방식에 대한 인식이 생산방식의 변화와 발전과 전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생산방식에 대해 천재적으로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전환을 이끌어 내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발전법칙과 내적 속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노동자계급과 인류 공동체를 파괴하는 구체적 현실에 대한 개입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며, 자기 욕망의 성격에 대한 성찰과 계급투쟁을 통해 다른 생산방식의 공동체로 변화해 가야 할 것이다. 엥겔스가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쓰고 있듯이, 실제로 이제까지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다른 생산방식의 출현을 알리는 ‘몰락’은 ‘계급투쟁’과 함께 한다. 계급투쟁이 없다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몰락은 필연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옥이 계속되거나 인류의 파멸을 맞게 될 뿐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발전시켜 온 인류를 지속시킬 다른 생산방식의 출현은 요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급투쟁’은 필연적인가.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그래왔다는 것, 곧 역사가 될 ‘지금 이 순간’, ‘현재’에도 계급투쟁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계급투쟁’이 계속되는 한 계급투쟁은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연적인 계급투쟁과 함께, 의식적인 계급투쟁을 통해서 ‘역사’는 지옥을 확대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다른 생산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산력이 아니라 계급투쟁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력이 발전한다고 해서,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다고 해서 인류가 발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물질적 풍요를 평등하게 누리거나, 마침내 계급이 사라진 사회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발전과 진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생산력의 증대가 양면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도 계급투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생산력의 증대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지만 그 과정이 한정된 자원의 무분별한 파괴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살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그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물질적 풍요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발전이며 풍요인지 자괴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 인류가 지속되어 풍요롭고 평등한 세상을 이루려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다른 생산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발전법칙을 따라가며 내적 속성을 드러내는 과학적인 계급투쟁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생산방식의 변화에는 ‘이윤율 저하’와 같은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내적 속성도 작용할 것이다. 또한, 그 변화를 위해서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떠받치고 있는 자본독재국가를 넘어 ‘노동자국가’로 그 성격을 바꾸어 가는 계급투쟁도 필수일 것이다.
국가를 비롯한 크고 작은 조직들에서 구성원들 간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부단히 평등해지려 애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노력은 조직의 성격을 바꾸어 나가는 일일 것이며, 조직의 구성원들 각자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가는 일일 것이다.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과 자기 욕망의 성격에 대해 성찰을 해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는 구성원들 간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기에 구성원 개개인 모두의 권리가 ‘평등’하게 보장되기가 대단히 어려운 조직이다. 그런데, 국가의 주인이 구성원 개개인들이라면 개개인들이 국가의 성격을 개개인들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해 주는 조직으로 변모시켜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성원 개개인이 국가권력의 폭력을 경계해야 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경계해야 할 것은 개개인들이 행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일 것이다. 자칫 개개인들이 스스로를 해방하려는 노력이 각자도생을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지옥을 자초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오징어 게임’의 배후가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속성인 ‘자본가계급’의 이윤, ‘자본독재국가권력’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때 개개인들의 자기 해방의 노력은 더 평등한 사회로 가는 서로의 다리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들이 스스로 해방되어 국가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홀로, 함께’하는, ‘거리 두면서 가까이’ 하는, ‘연대와 단결’을 위한 관계 맺음의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과 같은 유토피아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도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다른 생산방식으로 전환하려는 계급투쟁과 함께 개개인들이 관계 맺음의 지혜를 ‘지금, 여기’에서부터 실천해 가야 할 것이다.
오직 이윤 증식을 위해 사회 구성원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를 착취하고 살해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관계는 적대적인 모순관계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 협력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길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계급 없는’ 생산방식으로 전환시켜 가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상호부조하며 협력하는 관계를 일구어 가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다른 생산방식으로 전환하는 과학적이지 못한 유토피아적인 방법일 수는 있겠으나 노동자들 간의 그와 같은 상호부조의 관계 맺음을 거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발전법칙에 따라 살아가면서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와 다른 ‘생산방식’으로 변화시켜 가고 있다는 역사적인 필연을 서술하는 것이 과학적이라면, 유토피아주의적으로 개개인들이 ‘풍요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의미 있는 역사의 우연일 것이다. 유토피아와 과학이라는 두 대립 항이 상호침투와 보완을 통해 필연과 우연의 역사를 넘어선 역사를 써 나갈 수 있기를 지향한다.
ㅣ이상을 세워갈수도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질문을 마지막으로 받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그런 질문을 주고받은 기억은 있다. 받기도 했고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물음에서 ‘이상형’이라는 것이 ‘어디에도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만일 그랬다면 그와 같은 물음을 주고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물음에서 ‘이상형’이 의미하는 바는 ‘현실에서 가능한 만나고 싶은 사람’ 정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생각이 맞는 사람’ 정도였던 것 같다.
엥겔스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이라는 글에서 ‘유토피아’와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분한 바 있다. 양자가 의미하는 바는 다르지 않다.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 ‘계급이 사라진 사회’와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엥겔스가 양자를 구분한 것은 그런 사회로 가는 방식에 있다. 그 방식이 과학적인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과학적인 방식’은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과 노동자계급의 투쟁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한계에 이르는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과의 투쟁에서 승리하고, 노동자들이 국가의 주인이 되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그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과정을 통할 때 ‘과학적’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현실을 지양해 가는 과정 없이 천재적인 사람들에 의해 어딘가에 세워지는 ‘유토피아’는 실현 가능성이 낮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상태에 그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유토피아가 지속 가능하려면 누구나 그와 같은 유토피아의 주인이 될 정도의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생산관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엥겔스가 강조하는 것은 ‘과학적인 인식’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알아가면서 더 나은 쪽으로,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선되어야 할 것은 ‘과학적인 인식’이다.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유토피아에 이르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토피아(Utopia)를 흔히 ‘어디에도 없는 곳’, 가 닿을 수 없는 ‘이상향’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아무 것도 없는 곳’, 황무지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잿더미 위에 세운 새로운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상향’이라는 곳도 황무지로부터 세워나갈 수 있다는 것일 테다. 다만, 엥겔스의 말처럼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실천’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향이 어딘가에 있다면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말일 테다. 지난한 노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가능한 만나고 싶은 사람’, ‘이상형’을 이상향에 비추어 생각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나의 이상형인지 아닌지, 그 기준이 ‘외적인 조건’에 따른 것이라면 더 알아볼 것도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선은 그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알고 보니 이상형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천적인 노력을 통해 그 사람을 이상형으로 세워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향도, 이상형도 ‘현실적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더라도, ‘현실적 조건’에 대한 ‘앎’과 ‘실천’을 통해 제약을 넘어 ‘이상’을 세워갈 수도 있을 것이다.
2026.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