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39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변증법이라는 틀에 맞추려고 하는 이상 변증법적이지 않다는 것이 변증법이기도 하다. 변증법도 하나의 틀이라면 그 틀은 있는 듯 있는 것 같지 않은 있는 틀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틀을 ‘현실’, ‘사태 자체’, ‘전체’, ‘우주’, ‘자연’, ‘생명’, ‘사람’과 같은 ‘틀’로 이해한다. 그 틀은 이미 주어져 있기에 발견하고 느끼고 경험하며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고, 고정적이지도 불변적이지도 않아서 변하는 과정 중에 있어서 부단히 다시 알아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틀 내에서 그 틀에 맞추며 그 틀을 만들기도 하면서 그 틀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와 같은 틀이기도 하다. 그 틀 내에서 그 틀과 함께 인간이 만드는 틀도 있다. 삶과 죽음, 가난과 풍요, 선과 악, 참과 거짓, 미와 추, 사랑과 미움, 행복과 불행, 자본과 노동.. 인간이 만든 모순 그 자체이기도 한 그 틀 내에서 그 틀과 함께 그 틀이 야기하는 모순을 지양해 가는 모순의 과정이 변증법이기도 하겠다. 그 과정에 충실한 것이 해방의 과정이기도 하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매개과정의 총화


제일원리를 거부한다는 변증법적인 논의가 여차하면 또 다른 형이상학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다음에 개념의 운동과 관련해서 변화 발전과 관련한 얘기지만 동일성 철학의 측면 얘기할 때 동일성 철학에서 핵심은 ‘진리는 전체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체가 변화 발전해서 최종 단계까지 갔을 때 동일해지는 것이다. 개별자들은 다 모순에 빠진다. 전체가 되어야만 동일성 철학이 완성되는데 그 전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있다.

아도르노에게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전체라는 것이 분석도 안 되고 개념으로 파악되지도 않는 비합리적인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자연 전체도 아니다. 헤겔의 경우는 최대의 전체, 개념의 운동을 통해서 매개 과정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이 전체는 맑스가 얘기하는 구체적인 것과 거의 비슷하다. 맑스는 ‘구체’를 ‘제반 규정들의 총화’로 얘기한다. 반면에 추상은 그런 데서 뜯어낸 것이다. 뜯어낸 것이고 하나를 뽑아낸 것이고 압축해서 뽑아낸 것이다. 그것들의 총화가 구체적인 것이다.

과학은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해 가야 된다고 보고 ‘추상에서 구체’로 라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맑스가 얘기할 때 그것은 헤겔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헤겔을 그 자리에서는 비판한다. 그렇게 나타난 구체라는 것은 사유의 산물인데 헤겔이 사유의 산물을 실제 현실의 구체와 혼동한다고 비판한다.

이 전체는 그냥 뭉뚱그려서 우리가 분석도 못하는 신비로운 그런 전체가 전혀 아니다. 유기론적인 또는 유기체론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매개 과정의 총화’로서의 전체다. 이것이 아도르노가 지적하는 부분이다.



ㅣ연관, 역동 속에서


그러니까 현상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 그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가를 실제로 따라 잡아가는 것이다. 연관성을 보는 것이다.

헤겔이 생각했던 사고방식 중에 ‘표상적 사유’라는 개념이 있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사고하는 것이다. ‘그건 과학이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다. 개념은 그 사물의 본질을 잡아내는 사유다. 개념적 사유를 함으로써 필연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사물의 본질이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를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태의 필연성을 모든 단계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모든 단계라는 게 어느것들을 단계로 봐야되는지부터 해서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 어려운 이야기다. 하는 데까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물화’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현대사회로 오면서 분업이 보편화되면서 모든 생산 영역이 다 토막토막 나가지고 자기 것만 하고 나머지는 관심도 없고 모른다. 이것이 의식이나 감각에 계속 영향을 줘서 사고방식 자체가 특정한 부분만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다.

부분들 간의 연관을 안 보는 것, 상호 작용을 안 보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변화해 간다는 역동성을 안 보는 것이다. 내가 주체로서 거기에 개입해서 어떻게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실천적 관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 세 가지가 사물화 된 사고방식의 주된 특징이다. 변증법적 사고하고는 완전히 반대다. 루카치가 대리물로 등장시킨 것이 ‘총체성’이다. 총체성의 관점, 연관 속에서 봐야 되고, 역동하는 과정에서 봐야 되고,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실천적으로 변화할 것인가를 따진다.



ㅣ모순의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차이 나는 것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아도르노)

‘차이와 모순’에 관한 표현에서 아도르노의 것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오직 문제는 ‘모순의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에 있다고 여긴다.

아도르노의 표현에서 이목을 끄는 것은 아도르노가 ‘유토피아’를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아도르노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면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도르노가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목을 끄는 것이다.

만일, 아도르노가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를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라고 주장한다면,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이미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대립물의 통일의 상태인 ‘모순의 바다’에서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면 그뿐 아닌가. 그렇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으로서 상호 전도의 상태를 반복하면 그뿐 아닌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현실을 ‘모순의 바다’ 그 자체로 인식하는 이들에게,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의 상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와 같은 상태일 수밖에 없다. 오직, 주인이 되기 위한 생사를 건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한 사고를 가진 이들에게 차이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상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자신이 주인이 되는 것이지, 주인과 노예가 없는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상태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한편으로, 현실에 ‘모순의 바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오직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도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사랑의 상태와 같은 유토피아는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엄연히 현재 하는 ‘모순의 바다’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그 ‘모순의 바다’를 건너지 않고는 유토피아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모순의 바다’를 상정하는 아도르노의 현실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겠다면 현실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2026. 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