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40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해방은 독립이나 자립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독립이나 자립이 관계로부터의 고립이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발이나 자율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자발이나 자율이 의존하지 않는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해방은 그 반대일 것이다. 해방은, 해방을 위해서는 더 적극적으로 관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관계해야 할 것이다. 때론 고립이나 단절을 자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발이나 자율도 그 성격이 중할 것이다. 무엇을 위한 자발, 자율이냐가 중한 것이다. 해방을 가로막는 자발이나 자율일 수도 있는 것이다. 관계는 상호 의존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의존의 내용도 중할 것이다. 복종이나 지배가 아니라 협력을 위한 의존을 마다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자본이나 제국의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관계에서라면 더더욱 구체적인 상황에 맞는 해방을 위한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독립의 의미


‘자발自發’이라는 낱말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나서서 하는’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율’, ‘자립’, ‘독립’과 같은 낱말과 겹치기도 한다. ‘강제’, ‘타율’, ‘종속’ 등의 낱말과 대비되기도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 사회 내 존재, 사회적 관계의 총체, 상호 의존적 존재, 연결된 존재’라는 규정들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상태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의존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의존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인지, 어디서부터가 ‘스스로 나서’는 자발인지, 굳이 자발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관계’를 이루게 하는, 관계를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상호 ‘의존’이 어느 한쪽에 의한 ‘강제’, ‘타율’, ‘종속’을 야기한다면, 자율적이고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는 거부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그 감각적 반응은 의식적인 부정을 조직할 것이다. 그럴경우 ‘자발’의 내용과 성격에 대한 옮고 그름, 좋고 나쁨과 같은 가치 판단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 연유에서 자율적이고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개체에 내재한 사회화 된 자발이 자본 및 국가 기구들의 권력화한 강제나 타율에 의해 ‘자발적 복종’이나 ‘자발적 폭력’과 같은 행위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이겠다.

'자본독재' 아래 ‘의식’할 필요조차 없이 전자동 초연결 세계가 되어 감에 따라 ‘자발’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여긴다. 어떤 ‘자발’인가, ‘자발’의 내용과 성격이 중요해진다. 자발적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해진다. 자발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는 ‘자발의 가치’가 중요해진다.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에서 ‘자발성’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자발성’인가, ‘무엇을 위한 자발성’인가와 같이 자발성의 성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줄 것 같은 ‘자발성’이 ‘자발적 복종’, ‘자발적 폭력’ 처럼 ‘자발의 성격’에 따라 오히려 ‘의존을 강제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이다.

“남이나 위의 것에 속박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생활하거나 활동함”, “나라나 단체가 완전한 자주권을 가짐”과 같은 뜻을 가진 ‘독립’은 어떤가. ‘독립’은 중요하지만 ‘어떤 독립’인가, ‘무엇을 위한 독립인가’, 독립의 성격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독립이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할까.

‘독립’이 ‘고립’이나 ‘단절’이라는 낱말을 떠올려 준다. ‘독립적 고립’, ‘독립적 단절’이라는 어구를 만들어 보지만 ‘자발적 복종’이나 ‘자발적 폭력’만큼이나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자발’이 더 나은 의존이나 공존의 관계를 위해 어떤 자발이냐, 무엇을 위한 자발이냐는 자발의 성격을 묻게 된다면, ‘독립’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이 되어 자주권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그 자체로 이미 ‘자발’이나 ‘자립’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행위로 보인다.



ㅣ평등과 우애의 확산


자본독재에 기반한 제국의 지배 질서에 제국에 기생하여 제국의 질서에 편승하는 세계 각국의 정치경제 기득권 세력에 지배 당하지 않기 위해서, 개개인의 삶과 인류의 파멸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 그들에 맞설 대등한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처럼 제국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제국의 질서를 평등과 우애의 질서로 바꾸겠다는 전 지구인들의 연대의 힘을 확장 확대 확산하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표방한다면 현재 지구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 경제 위기에 띠른 전쟁과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해 적극 동참해야 할 것이다.그들 ‘국가’들이 진정으로 자국 국민들의 부와 안녕을 목표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라면 그래야 할 것이다.

혹시, 각국의 권력자들이 ‘전쟁과 기후 재앙’을 자신들의 기득 권력 유지 강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면 그들 국가들은 더 이상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과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해서, 지구 국가들의 민주화를 위해서 각국의 노동자, 시민, 민중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대하고 있는 것이겠다.



ㅣ대부분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어느 글에서 목숨만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항일 독립 투쟁에 나섰던 이회영 일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의 행위를 ‘그렇게 살도록 교육받은’ 결과로 이해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양심과 책임을 다하려는 자존감을 지키며 살도록 교육받은 결과라고 이해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요구되는 양심과 책임과 자존감의 크기도 커질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도록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살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고도 이해한다. 또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부와 권력에 대한 유혹도 커질 것이기 때문에 교육받은 대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살기가 어려울 수 있다고도 이해한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교육받은 대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살지 못할 때, 살지 않을 때,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은 사회 구성원들이 치러야 할 고통도 커질 것이다. 한데,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아도 그렇게 살도록 교육받은 사회 구성원들은 존재한다.

또한, 그렇게 높은 교육을 받지 않고도 그렇게 사는 구성원들도 존재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만큼의 양심과 책임을 다하며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서 사회는 버텨지고 견뎌지며 굴러간다.




2026.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