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을 쓴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표현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최근 들어 주변에서 자식을 둔 부모들로부터 심심찮게 듣게 되면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들이 저 표현을 쓰는 심정은 자식 키우느라 힘들다는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 자식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라고 나는 받아들인다. 경제적으로 더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더 나은 대학에 갔더라면 취업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텐데라는 취업이라는 문 앞에서 무기력한 당신들 자신에 대한 자책인 것이다. 당신들이 고생하는 것은 괜찮은데 당신들의 힘으로 자식들이 고생하지 않는 길을 열어줄 수 없음에 대한 괴로움의 토로인 것이다.
자식이 없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빈 술잔을 채워주거나 국가 정책에 대한 정치인들에 대한 푸념을 들어주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이렇게 글로 생각을 남긴다. 나는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도 여느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독립된 인격체로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데 상호 협력자로서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돌보아야 하는 어린 시절이 문제일 것이다. 부모의 경제력과 직장에 의해 아이들이 차별과 불평등을 겪지 않으면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중할 것이다. 부모들이 모를 리 없고 그러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도 없을 것이다. 부모들도 국가 정책과 정치 및 교육 환경에서 성장해 왔고 그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모의 경제 사정과 교육 환경이 대물림되는 것이다. 국가 정책과 정치에 의해 부모들의 경제 사정과 교육 환경에 변화가 따르지 않는 한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취업난, 실업, 소득 격차, 비혼, 저출산 등에 따른 가족 구성에서부터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들이 모를 리 없지만 국가 정책과 정치인들에게 토로하는 것 말고 무얼 하겠나.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전쟁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을 모르듯
남의 떡이 커 보이듯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을 욕망하듯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자신들이 지켜야 할 가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들은 아는지
무엇을 어떻게 지키며 사느냐
각자 함께 살아야 할 전쟁
ㅣ전쟁과 유산
전쟁의 원인을 밝히고 인류의 유산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역사]를 썼다고 헤로도토스는 전한다. 전쟁의 원인은 무엇이며 인류의 유산은 무엇인가. 전쟁의 원인은 강자들의 탐욕이며 인류의 유산은 그들의 침략을 물리친 지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전쟁과 학살로 얼룩진 인류의 역사에서 과연 후세에 물려 줄 유산은 전쟁으로부터 평화를 지켜 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 싶다.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 연합군이 살라미스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조선의 백성들이 명량해전에서, 호치민과 베트남인들이 정글에서 침략자들을 물리친 지혜 그 이상의 지혜, 즉, 인류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지혜는 없을까라는 물음에서 각국의 정부가 전쟁에 관여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함께 만들어가는 국민들의 지혜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강대국들의 권력자들이 침략전쟁을 멈출 일은 없어 보인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자생력을 키우며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보다 무력으로 빼앗는 관습 속에서 살아 온 것이다. 하지만, 강대국의 권력자들을 선출하는 것도 국민들이라는 점에서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통해서 짐작케 하는 전쟁의 원인은 ‘관습’이다. 2,500여 년 전의 인류에게 ‘무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은 악행惡行이라기 보다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관습이었다. 약탈 전쟁이 그렇고 노예제가 그랬다.
헤로도토스는 현자賢者 솔론의 입을 빌어 누구나 모든 복을 타고날 수는 없으나 누구나 타고난 복이 있으니 남의 복을 탐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복을 죽을 때까지 누리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남의 것을 빼앗아 더 많은 복을 누리려는 행복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누구나 더 많은 복을 누리기 위해 남의 복을 빼앗으려 한다면 자신이 가진 복마저도 누리지 못한 채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말일 것이다.
이는 훗날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1516년)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재산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정되어 있는 한 누구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수는 불안해하고 다수는 완전히 비참하게 살기 때문입니다.”
퀴로스왕은 세력을 넓히기 위해 이웃 나라를 침략하자던 신하들에게 다시 복수를 당할 것을 각오하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또한, 척박한 땅을 일구며 주인으로 살 것인지, 비옥한 땅에서 지배받으며 노예로 살 것인지 선택하라고도 한다.
인류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나 현자는 있기 마련이고, 자애로운 권력자들도 있을 테지만 자신의 생존과 안위를 위해서 전쟁과 학살을 일삼는 권력자들도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결국, 전쟁을 멈추는 것은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력을 국민들이 허락하지 않는 길 밖에 없을 것이다. 전 지구적인 민주주의나 평화를 바라는 이들이 권력의 주인이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ㅣ정부의 성격
무정부주의나 자치정부를 주창하는 이들의 이유는 국가라는 이름을 가진 정부의 권력의 사유화라는 폭력 때문일 것이다.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 분립과 상호견제라는 형식을 갖추더라도 그들 삼권을 이루는 정부가 한통속이 되어 국민들과 분립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들을 견제하며 통제하고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료주의라고 불리는 국가 권력의 남용에 따른 폭력은 그 정도만 다를 뿐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들의 민낯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가라는 이름 아래 관료들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관료제 국가에서 국민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정치인과 관료의 성격을 바꾸는 일일 것이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의 안녕과 부를 위해서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하게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정치인, 그런 관료, 그런 정부를 바라는 국민들의 수가 늘어난다면 선거를 통해서든 사회 운동을 통해서든 정부의 성격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지구상에 무정부의 정부나 자치의 정부가 존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 기반 역시 정부 관료들과 정치인의 성격일 것이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입법, 사법, 행정, 정치, 정부인가. 그들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국민이어야 하고, 국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26.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