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을 쓰자 42

by 영진

나는 해방을 쓴다. 일상의 스트레스로부터의 해방은 당장 시급한 해방일 수밖에 없다. 스트레스는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기에 스트레스 해소는 일상의 해방을 위해 중요함을 넘어 중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는 사람관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가정과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관계의 스트레스가 극심하여 관계를 단절하기도 한다. 오랜 친구도 심지어 가족마저도 단절하기도 하지만 직장은 단절할 수가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해서 직장을 단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직장 내 민주화, 직장 간 민주화는 스트레스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계 관계에 따른 구조적 스트레스 해소, 노동시간 단축, 임금 격차 해소와 같은 직장 민주화를 위한 정책은 국민의 생존 및 삶의 질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국가의 질, 정치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겠다.


경제 양극화와 소외를 넘을 소유 방식,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변증법적 인식, 대중을 사로잡을 이론적 무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해방을 쓰기 위해 나는 위의 주제들을 염두에 두면서 ‘사람, 자연, 책, 여행, 문학, 예술’과의 만남 속에서 현실을 읽고 바라는 현실을 쓴다. 나는 그렇게 해방을 써나간다. 글과 함께 나의 해방을 짓는다.



ㅣ지향과 지양


‘지향한다’는 말은 사전적 의미(‘뜻을 모아 향하다’)처럼 어떤 방향을 향해서 간다는 것이지 그 방향의 목적지가 고정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지향하는 바의 구체적인 내용은 유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향한다’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간다는 의미가 강한 것이기도 하다.

그 방향을 향해 가는 것도 ‘지금,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현재의 상태에 대한 풍부한 인식에 근거해 현재의 상태를 뜻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바꾸며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향’과 ‘지양’이라는 말의 의미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로의 지향점은 같거나 비슷할 수 있지만, 지양해야 할 구체적인 현재의 상태는 각자 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지향점은 비슷해도 각자의 처지에 따라 지양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정규직, 비정규직, 대기업 직장인, 중소기업 직장인, 자영업자, 사무직, 현장직, 일용직(특수고용) 등 일의 형태에 따라 경제적인 처지는 다르다. 가족 구성 형태, 가구원 수, 부양가족 여부, 남녀 성별도 삶의 처지를 다르게 한다.

그럼에도 일(노동)이 자기실현을 위한 의미 있는 창조적 행위,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움이 되는 행위이기를 바란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 현재의 임금체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노동시간 단축, 여성이나 지역, 학력에 따른 임금 차별이나 유리천장과 같은 차별, 권위주의적인 직장 문화를 없애야 한다는 ’지향점‘은 비슷했다.

그리고 각자 처지가 다르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비슷한 지향점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가능한 자기 활동들(성찰, 예술, 연구, 제도 개선 등)을 해야 한다는 지향, 그 활동에는 현재의 상태를 알아가는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는 지향도 비슷했다.



ㅣ일은 자기실현일까, 고통일까


「일은 자기실현일까, 고통일까」라는 글에서 류동민은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어떤 일을 취미로 즐긴다면 출발은 즐거움이고 자기실현을 한다는 보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일’이 되면 생존을 염려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생존을 유지하려고 일해야 하는 악순환에 맞닥뜨린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할 때 무리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 하며, 즐길 수도 없고, 때로는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일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류동민은 모르텐 알베크의《삶으로서의 일》을 인용하며 일의 의미는 “일에서 얻는 만족이나 행복과는 서로 다른 얘기”라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의 경험을 예로 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만족이나 행복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건이지만, 가족과 지인들이 한데 모여 누군가를 추모하면서 정신적 유대를 나누는 의미 있는 일이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일은 자기실현일까, 고통일까’,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일까’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류동민은 ‘노동의 본질은 무엇일까?’ 묻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노동이 그 자체로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두말할 나위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매 순간은 아니더라도, 어느 한순간이라도 힘듦이나 괴로움을 넘어 노동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노동의 본질에 조금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의 본질에 접근할 때, 이른바 자기실현으로서의 일의 역할도 충족된다. 경제학에서도 노동을 한편으로는 비효용(Disutility), 즉 만족이나 효용(Utility)의 반대 개념, 요컨대 고통(Toil and trouble)이라 보는 관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실현’이나 ‘소외의 극복’으로 보는 관점이 있다. 사실 이 두 가지 관점은 모든 노동이 지닌 두 측면을 묘사한 것이며 이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일의 의미를 깨닫기도 하고 아울러 일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

류동민의 주장에 따라 ‘노동의 본질’을 ‘그 자체로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주장에 따라 ‘일(노동)의 의미’를 노동이 가진 두 측면, ‘고통과 자기실현’이 만나는 지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을 통해 ‘노동해방의 의미’를 ‘고통과 자기실현’이 만나는 지점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노동이 ‘고통이냐, 자기실현이냐’는 이분법을 넘어 고통은 줄이고 자기실현의 영역은 확장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지혜의 발현은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그 자체로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노동을 할 수 있는 생산방식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일 수 있을 테다. 그와 같은 지혜로운 행위가 자기실현의 한 양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사람들은 화폐 없이 생존할 수 없기에, 화폐의 축적 정도가 사회적 인정의 척도가 되기에, 화폐를 소유하고 축적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게 만드는, 화폐가 생기는 일만 하고 싶게 만드는 욕망 구조를 생산하기에, 부모·연인·친구·와 같은 사랑과 우정으로 맺어져야 할 관계마저도 화폐로 환산하게 만들기에, 그와는 다른 생산방식을 살아보기 위해서 ‘非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관계 맺음을 통해 ‘화폐 중심 생활방식’을 ‘잠들게’ 하는 것도 자기실현의 한 양태일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자기실현의 행위를 통해 ‘자본독재국가’의 성격을 ‘노동자민주국가’로 바꾸어 나가는 매 순간들은 당면한 인류의 ‘경제 및 기후위기’를 해소해 가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인류사의 위기가 전 지구적이라는 점에서 인류사에 이제까지 없었던 ‘노동자민주국가’라는 ‘사건’의 생성을 우연에 맡길 것이 아니라 ‘우연인 듯 우연 아닌 우연 같은’ 필연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우연의 철학들이 자기실현을 통해 생성해야 할 ‘사건’ 일 것이다.



ㅣ탈성장의 의미


‘탈성장’이라는 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이토 고헤이 작가의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때문이다. 책에서 작가가 말하는 ‘탈성장’의 의미는 ‘성장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성장의 속도를 늦추자’는 것이다. 그 말은 ‘자연의 신진대사에 맞게 합리적으로 생산하자’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이윤의 무한 증식을 위해 자연자원을 파괴하면서 무분별하게 생산함으로써 ‘성장’이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더 이상의 성장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의 파괴에 따른 환경위기, 식량위기로 인해 인류의 존속마저 위협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해서, 성장을 위한 생산력 증대, 과학기술의 발전을 멈추자는 것이 아니라 자연 파괴를 최소화하면서 기계적 자동화에 따른 인류의 위기(실업, 양극화, 관계성 파괴)를 최소화하자는 것이다. 금욕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 무분별한 생산과 소비를 억제하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생산을 위한 자연 파괴, 소비를 위한 관계 파괴를 억제하자는 것이다.

사이토 고헤이는 성장의 ‘속도를 늦추자’고 표현한다. 성장을 멈출 수는 없지만, 속도를 늦춤으로써 인류 파멸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파멸을 늦추자며 ‘탈성장’을 주장하는 그에게 동의하는 이들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 원인 역시 ‘자본주의’에 있다. 자본주의는 과학기술의 발전, 생산력 증대, 무한 이윤 증식에 의해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생산력 증대를 늦춘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와 충돌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내재한 작동원리에 따라 ‘성장을 늦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장을 지속하면서도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이토 고헤이의 주장을 따르겠다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에 제동을 걸만한 ‘사람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자연의 신진대사에 따르는 합리적인 생산방식으로 대체할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지구상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와 다른 생산방식을 지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다른 생산방식을 추구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자본주의 생산방식과 다른 생산방식을 위해서는 ‘생산수단’의 소유 방식이 관건이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물을 생산하는 ‘생산수단’을 거대 자본의 ‘사적 소유’에서 ‘국유화’, 혹은 ‘사회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다른 생산방식을 바라는 사람들이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통해서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경제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는 입장이 있다.

사이토 고헤이를 비롯한 또 다른 사람들은 ‘국유화’가 아니라 ‘사회화’, ‘사회적 공유’, ‘커먼 common’을 주장한다. 국유화는 소수 사람들의 또 다른 ‘사유화’를 의미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해서, 사이토 고헤이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공유’의 확대, ‘노동자협동조합’을 통하는 생산방식을 주장한다. 그와 같은 생산방식을 통해서 그는 ‘탈성장 코뮤니즘’, ‘탈성장 사회’로 나아가기를 주장한다.

사이토 고헤이는 ‘탈성장 코뮤니즘’의 구상을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사용가치 경제로 전환’, ‘노동 시간 단축’, ‘획일적인 분업 폐지’, ‘생산 과정 민주화’, ‘필수 노동 중시’”가 그것이다. 필자는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사회화, 그 두 가지 방식을 분리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고 있다. 결국 ‘생산수단’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을 거대 자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자본독재 국가가 아니라 ‘생산수단’의 민주적인 국유화가 가능한 ‘민주국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가 가능한 ‘민주사회’를 이루는 것이 관건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가와 사회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평등을 보장하는 국가와 사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민주적이고 평등한 국가와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적인 국가와 사회를 민주화하는 과정에서 ‘생산수단’의 민주적인 국유화와 사회화를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관심을 가지고 ‘생산 수단’의 국유화, 사회화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사회화, 어느 쪽이 우선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국유화와 사회화를 이루어 갈 만한 민주적인 국가, 민주적인 사회를 이루는 문제인 것이다.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의 민주국가와 민주사회의 형성, 그것만이 지속 불가능한 자본주의를 지속 가능하게 하면서, 더 나아가 인류의 생명을 연장하는 길일 것이라고 여긴다.

‘민주국가와 민주사회의 형성’은 각국의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함께 이루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민주국가와 민주사회’를 이루는 만큼, 그만큼 풍요로운 인류의 지속 가능성도 커질 것이라고 여긴다.




2026.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