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_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by 영진

나를 갈라 나를 꺼낸다는 것은 제게 여성적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성적 글쓰기라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남성 중심적인 것, 혹은 가부장적인 것, 그리고 백인 중심적인 것이 지겹고 싫다는 건 알았어요. 그러면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어떻게 가능하지? 여기서부터 우리는 무언가를 발명해야 하는 시점을 맞게 됩니다.

아닌 건 뭐가 아닌 건지 압니다. 김훈이 월경 이야기를 하면 후지다는 건 알죠. 그럼 여성이 여성 이야기를 한다는(340)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제가 좆펨처럼 말하면 여성적 말하기인가요? 아니면 주현영 인턴기자처럼 떨면서 말하면 여성의 말하기인가요?

혹은 남자처럼 말할 수도 있죠. 남자처럼 말하되 그 사람이 여자로만 바뀐다면, 하미나가 이준석처럼 행동하고 이준석처럼 당 대표가 되어 활동을 한다면 그게 여성적인 활동인가요? 우리는 많은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염된 것들뿐입니다. 나는 여성적인 게 뭔지 몰라요. 내가 진짜 뭔지도 모르고요. 세상에 가짜 여성에 대한 이야기만 엄청나게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짜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더 진실된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 저에게는 글쓰기입니다. 나를 갈라 나를 꺼낸다는 것은 아주 많은 소음과 뜬소문 사이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말 그대로 나를 갈라서 나를 꺼내는 과정입니다. 어떤 점에서, 모르겠어요, 저에게 하강의 이미지가 있거든요. 저는 이게 계속 내려가는 일이라고 느껴요.

이 일이 여성에게 더 유리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진실한 글을 쓴다는 것이 더러움으로 취급받았던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분열과 혼란을 겪기 때문에. 그 분열과 혼란이 힌트를 주기 때문에.

여성적 글쓰기를 오래 탐구한 작가 엘렌 식수의 글을 조금 읽어보겠습니다.

진실은 글쓰기가 ‘원하는’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전적으로 저 아래에 아주 아득하게 멀리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341) 사랑하는 이들, 제가 언급한 작가들은 모두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노고를 쏟아 자신의 글을 구부려 저 멀리 있는 진실 쪽으로 정렬한 이들입니다. 이들은 원소들에 대항하여 무엇보다 셀 수 없이 많은 당면한 내적 외적 적들에 대항해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외적인 것들이 아주 강력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 있는 입자, 반딧불이 주위에는 진실의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소음과 소문 제조기들이 기를 쓰고 만들어 내는 엄청난 소음과 소문의 합주가 울려 퍼집니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내적인 적들도 많습니다.

우리의 공포와 관련된 것들이지요. 우리를 구성하는 것, 우리의 약점 말입니다. 카프카가 말했습니다. ‘낙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낙원을 되찾지 못한 이들이며, 우리가 아직 낙원을 찾지 못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두 가지 악덕, 즉 게으름과 조바심을 앓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으며 게으름과 조바심으로 인한 서두름 탓에 제자리에 멈추고 맙니다.

저는 내적인 적이 외적인 적만큼이나 강력하다는 말에 공감했어요. 왜냐하면 혼란과 분열된 장면들을 끌어안고 산다는 건 나를 공포에 떨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연결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주기도 하고요.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굉장한 두려움을 줍니다.

식수는 또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342)


글쓰기는 죽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법, 다른 말로 하자면 삶의 극단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그게 망자들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 인간이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끝을 경험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우리의 세계를, 한 세계를 잃을 필요가 있고, 세상에 한 세계보다 더 많은 세계가 있음을,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의 세계가 아님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ㅣ출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하미나 지음, 물결점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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