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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시작

자의식적인 눈

영화 <히든> 읽기

by 영진


“영화 안에서의 진실, 미디어 안에서의 진실, 이것은 다 조작이다”


영화 <퍼니게임>과 <피아니스트>로 알려진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말이다.


2005년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히든>(Cache/Hidden, 프랑스, 2005)에서도 감독의 질문은 계속된다. 어떤 것이 진실인가?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나?




TV프로그램 진행자인 조르쥬와 출판사에서 일하는 안느 부부의 일상은 아주 평온해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날, 집 앞에 비디오테이프 하나가 섬뜩한 그림과 함께 놓여있다. 그 테이프 안에는 부부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누군가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부부의 평온은 깨지기 시작하고 영화는 관객들이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범인은 누구인가? 테이프 내용을 통해 알아낸 집에는 아는 사람이 살고 있다. 마지드. 그는 40여 년 전 조르쥬와 어린 시절을 같은 집에서 보낸 알제리인이다.


마지드는 테이프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조르쥬는 그가 범인임을 “단정”한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마지드의 출현으로 인해 조르쥬의 일상은 점점 불안과 공포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르쥬가 잊고 살았던 과거의 일들... 아니, 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의 오랜 식민 지배를 받아 온 알제리인들이 1961년 10월 파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다 200여 명 이상이 경찰들의 손에 죽거나 센 강에 빠져 죽게 되는데 거기에 마지드의 부모도 있었던 것이다.


이후 부모 잃은 마지드를 조르쥬의 부모가 입양하려고 하자,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기 싫었던 조르쥬는 마지드를 모함하게 되고 마지드는 집에서 쫓겨나 고아원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드가 40여 년 전 조류주의 모함에 대해 앙심을 품고 조르쥬에게 복수를 하러 찾아온 것'이라고 밝혀지면 이야기는 끝날 것이다. 하지만, 마지드는 자신이 테이프를 만들지 않았다고 끝내 부인하고, 그런 마지드에게 조르쥬는 원하는 게 뭐냐고 협박까지 한다. 아니라는데 자꾸만 그러는 이유는 자신의 과거, 과거의 죄 때문이다.


범인이 누구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먼 과거의 죄를 떠올리기 싫은 것이다. 자신의 일상이 침범당하는 것이 불쾌하고 귀찮을 뿐이다. 그의 꽉 짜인 일상에는 '왜 그랬는가?'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런데, 계속해서 또 다른 테이프가 그의 집 앞에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들과 함께 놓이고, 조르쥬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범인이 확실한 것 같은데, 아니라고 잡아떼고 증거는 없고 자신의 과거 기억은 계속 찾아오고 미칠 지경이다.




그러던 중 마지드가 테이프에 대해 말하겠다며 조르쥬를 불러놓고는 그 앞에서 목에 칼을 그어 자살한다.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일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조르쥬에 대한 항거일까. 평생 식민지인으로 살아온 알제리인들의 억눌린 현실에 대처하는 마지막 방법일까. 내가 안 했다는데, 죄를 덮어씌우고 그러면서, 정작 자신의 죄는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 지식인에 대한 울분일까.


어떤 이는 모함으로 인해 평생을 억울함 속에서 살았을 수도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일상이 조금이나마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일상을 침범당하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지만, 내가 지은 죄는 얼마든지 죄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일까. 늘 지배만 해 온 자들의 역겨운 당당함, 아니, 뻔뻔함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드의 죽음으로 조르쥬는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이로써 모든 것은 끝났다. 범인이 누구이든, 마지드가 왜 죽었든, 그가 알 바 아니다. 자신에게 그토록 중요한 평온한 일상이 되돌아온 것이다.




끝내 감독은 범인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인가? 그 어떤 것도 단정 지을 수 없다. 범인이 마지드 같기도 하고, 그의 아들인 것 같기도 하다.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죄에 대한 조르쥬의 신경과민이 만들어낸 허구일 수도 있다.


애초에 감독은 범인에는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감독의 목적은 범인이 누구인지와 상관없이 관객들이 끊임없이 범인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자연스럽게 프랑스 지식인 조르쥬의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그 영화를 비추는 또 하나의 카메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카메라의 주인은 제작자(자본 권력) 일 것이다. 결국, 영화 속 진실은 제작자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영화와 미디어가 거대 자본의 손에 있다는 것, 자본과 권력을 위해 진실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진실이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감독의 답은 아무도 믿지 마라거나 네 멋대로 판단해가 아니라 모든 미디어는 조작 가능하니 무조건 믿지 말라는 것일 테다.




카메라에 담긴 영화와 미디어의 진실은 제작자의 진실이라는 사실, 그 진실이 조작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잊지 않고 영화와 미디어의 진실을 대면하는 ‘자의식적인 눈’을 가지는 것이 관객들에게 중요하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럽지 않다.


더 나아가 ‘영화와 미디어’만 아니라 우리의 자의식적인 삶 자체가 오직 이윤추구만을 목표로 하는 ‘자본 권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럽지 않다. 해서, 진실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늘 부단히 제기되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럽지 않다.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묻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다가가는, 조작되지 않은 진실을 만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더 많은 지식인, 창작자, 대중들이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자의식적인 눈'을 통할 때 진실이 조작되지 않을 가능성, 자본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진실한 삶의 세계를 만날 가능성은 커질 테다.



2006.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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