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과반 입시학원을 나와서 집으로 나를 데려다줄 버스를 타기 위해 건너야 할 횡단보도 앞에 서면 자연스레 시선이 길 건너 음반 가게를 향했다. 그곳에선 늘 음악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준비한 것만 같은 음악들이 지친 나를 안아주었다.
베토벤의 ‘월광’, ‘비창’, 쇼팽의 ‘녹턴’,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Wham의 ‘Last Christmas’, 들국화의 ‘매일 그대와’, 핑크 플로이드와 너바나 Nirvana의 음악들이 나의 발길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음악을 사랑하던 사장님이 클래식과 음향기기, 음악도서와 친해지도록 해주었다.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그 공간은 나에게 음악의 고향과 같은 곳이 되었다. 마냥 좋아서 듣기만 하던 음악에 넓이와 깊이를 더해준 곳이기도 하지만, 입시의 시간에 위안을 준 공간이라는 점에서 고향이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도 가끔 그곳을 지날 때면 더 이상 그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그 공간을 생각나게 한다. 마치 여전히 있는 것처럼, 그곳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음반, 음향 기기, 도서뿐만 아니라 가게에는 악기도 다루고 있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통, 클래식, 일렉, 베이스 기타 중에서 실제로 배운 것은 통기타지만, 베이스 기타가 좋았다. 베이스 연주가 돋보이던 너바나 음악의 영향이기도 했을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저음을 내면서도 음악의 전반적인 리듬과 화음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나의 성향이 그러해서 베이스 기타를 좋아했던 것인지, 베이스 기타를 좋아해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지금의 나의 모습에서도 그와 같은 성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드럼을 좋아했던 것도 비슷하다. 그룹 들국화의 드러머 주찬권이 멋있어 보여서 드럼이라는 악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뒤에서 묵묵히 음악의 시작을 알리고 끝을 맺곤 한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때문에 ‘드러머’의 꿈이 생기기도 했고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던 친구에게 배움을 청했는데 제대로 안 할 거면 시작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않았다. 요즘은 드럼, 드러머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영화 <위플래쉬>가 먼저 생각나기도 한다.
피아노를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베토벤과 쇼팽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와의 연관도 적지 않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피아노>에서 주인공 에이다에게 ‘피아노’는 '언어'이자 '목숨'이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배경인 '아우슈비츠'에서 쇼팽의 ‘발라드’가 연주된다.
미국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영화 <엘리펀트>*에서 두 학생이 총기 난사 직전 교실을 향해 가던 평온함을 배경으로 흐르던 베토벤의 ‘월광’, 영화 <허공에의 질주>에서 대니가 연주하던 베토벤의 ‘비창’도 그중 하나다.
피아노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고 연주하고 싶은 소품들을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은 있다. 스스로 천재 음악가라고 자부하던 한 친구 덕분에 동생 한 명이랑 셋이서 트리오를 결성하게 되었고 첼로를 6개월 정도 배워서 연주한 적이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난 것인지 아직 천재성이 세상에 드러난 것 같지 않은 친구, 베를린에서 만난 작곡을 전공하던 친구, 바이올린으로 베를린 시향 단원을 준비 중이던 친구, 안부를 물으며 그들의 행운을 빈다.
첼로를 계속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고 앞으로 배울 기회는 있을 것이다. 기타, 드럼, 피아노에 대한 관심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배움에 대한 미련은 없다. 음악을 감상하고 글 쓰는 것에 만족하려 한다.
이제 나에게 남은 할 일은 ‘책’을 몇 권 쓰는 것이 전부가 아닌가 생각한다. 10년 정도 열심히 ‘책’을 쓰고 그 이후에는 아직 못 가본 지구 곳곳을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글을 쓰며 살아가는 ‘꿈’을 꾼다.
2024. 2. 28.
*영화 <엘리펀트>를 보게 된다면 같이 보면 좋을 영화 및 논문입니다.
-마이클 무어, <볼링 포 콜럼바인>, <다음 침공은 어디?>
-전준혁, <비극을 다루는 영화의 공정한 시선에 대하여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격사건을 다룬 영화들을 중심으로>, 기초조형학연구 제18권 제6호, 2017, 537 – 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