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계속 쓰긴 했지만 익숙하지 않았던 ‘논문’ 형식의 글을 써야 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글쓰기가 힘겨웠다. 순수 창작 글을 쓰는 것도 그렇지만, 논문을 쓰는 것도 고된 노동이다. 자료를 찾아 정리하고, 외국어 원서를 번역하고, 그들의 주장을 해석해 내 의견을 붙이고, 절대 시간을 확보해야 하고, 끈덕진 엉덩이의 힘이 요구되는 일이다.
글쓰기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던 그 당시의 물음 중 하나가 ‘글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글에 대한 평가가 뒤따르는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글을 어떻게 잘 쓸 것인가’와 같은 고민에서 나온 물음이었던 듯싶다.
그 물음은 글을 써서 세상에 내놓는 순간 글은 더 이상 저자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그 답은 스스로 완벽에 가까운 글을 썼다고 자부하더라도 글을 내놓는 순간 어떠한 것이든 독자의 평가는 따르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평가(결과)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글쓰기의 구상에 따라 글을 쓰는 과정에 집중하자는 자기 주문을 하는데 이르게 해 주었다. 그와 같은 주문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고 여긴다.
누가 뭐라든 나의 글을 쓴다는, 나의 길을 간다는 칼 맑스와 같은 이들을 만난 것도 글쓰기만 아니라 삶의 길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을 견디며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가려던 길을 가다 보면 분명 이전보다 나아지고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들이 불현듯 찾아오곤 한다. 그 기쁨을 뒤로 한 채 또 나아간다.
지금 나의 글쓰기는 ‘에세이’다. 아도르노는 ‘에세이’라는 형식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서론-본론-결론’으로 구성되는 논문 형식은 이미 위계적(폭력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글 안에서 모든 문장이, 문장 안에서 모든 단어가 평등하게 쓰이는 글쓰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한 곡의 음악 속에서 각각의 음이 자신의 소리를 냄으로써 하나의 곡이 이루어진다는 식이다. 글에서 각각의 문장이, 단어가 자신의 자리에서 의미를 가짐으로써 하나의 글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글쓰기가 ‘에세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아름다운 별자리 형상을 이루어내는 것처럼 인간들의 세상도 그러한 ‘별들의 짜임과 같은 관계’를 이루기를 바라는 그의 평등에 대한 사고가 글쓰기나 음악에 대한 생각에서도 드러난 것이다.
아도르노는 늘 자신이 주장하는 것들은 하나의 ‘모델’ 일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듯 그의 모델을 참고하면서 나
의 모델을 만들어 가면 될 것이다.
지금 나의 글쓰기는 논문에 목매달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홀가분해졌고, 시와 소설과 비평이 한데 어우러진 ‘에세이’를 쓰는 것이기도 하고, 한 단어, 한 문장, 한 편의 글과 같은 ‘한 권의 책’을 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024.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