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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Jul 22. 2023

‘한 사람’이 인류를 구한다

영목, 쉰들러 그리고 짝꿍

1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노!” 영화 <수성못(Duck Town)>의 주인공, 대구에 사는 희정의 심정이다. 입에서 욕이 나올 만큼 화가 나 있다. “인마, 좀 치열하게 살아라 치열하게!”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생 희준에게 충고를 할 만큼 “치열하게!” 살고 있는 희정이라서 그 심정에 더 공감이 가기도 한다.    

  

희정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딸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잔소리를 할 뿐이다. 엄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희정도 알바에 편입 준비를 하며 치열하게 살고 있지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부모의 경제력과 지방 출신’이라는 ‘출생의 조건’에 의해 삶이 제약을 받는, 자신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화가 날 뿐이다. 엄마의 잘못이 아니지만 엄마가 화풀이의 대상이 될 뿐이다.     


희정이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를 리 없다. 세상은 서울과 부자들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세상이 왜 그렇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런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잘 안 바뀌는 것도 서울과 부자들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울로 가려고 하고 부자가 되려고 한다. 부모도 고향도 바꿀 수는 없지만 떠날 수는 있다. 그래서 희정이 선택한 길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편입하는 것이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희정의 선택이기에 최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희정의 선택 앞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이유는 대구를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희정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떠나지 말고 대구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대구를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자고 말하고 싶지만, 만일 그날 희정과 영목의 술자리에 내가 있었더라도 희정에게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편입시험에 꼭 합격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희정이 대구를 떠나거나 남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서울로 떠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개인 희정으로서는 어디에서든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중요한 건 서울과 부자 중심의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대구의 희정들의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은 것 같고 비전이 있을 것 같은 서울로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최선의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심지어 영목처럼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며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이 점점 더 늘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대구가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도시가 된 것도 서울과 부자 중심의 세상에서 자꾸만 밀려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희정에게 대구를 떠나지 말라고 말하지 못하듯 영목에게도 죽을 용기로 “치열하게!” 살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희정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그들도 치열하게 살지 않았을까. 치열하게 사는 희정도 수성못 자살의 전설에 귀 기울이게 되듯이 말이다. 벌써 자살에 세 번 실패했으니 영목이 더 이상 자살 시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만 이미 자살 시도가 습관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울 뿐이다.     


세상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희정이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다. 영목이 자살카페를 운영하며 사람들의 자살을 돕는 과정에서 “세상에 자기 얘기 들어주는 사람 딱 한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은 안 죽는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도 희망적이다. 영화가 대구의 수성못을 배경으로 제작되었다는 것도 희망적이다. 대구에 살면서도 수성못에 그런 자살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지 몰랐는데 알게 되었다는 것도 희망적이다. 



2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는 실존 인물인 오스카 쉰들러를 통해 ‘한 사람’의 소중함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알려주었다. 독일인 사업가였던 쉰들러는 나치 당원이 되어 폴란드의 공장을 운영한다. 그리고 죽음에 내몰린 수용소의 유태인들을 고용하면서 그들을 한 명씩 구해내기 시작한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1,200여 명의 유태인의 생명을 살렸다.


기업인인 쉰들러는 수용소의 유태인을 고용함으로써 이윤을 취하려 했다. 하지만 유태인에 대한 나치의 무차별적인 만행을 목격하면서 양심이 흔들렸을 것이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담배 하나 입에 물고 창밖으로 보이는 유태인을 상대로 사격 연습을 하는 것은 장교들의 일상일 뿐이었다. 장교들에게는 쉰들러와 같은 양심이 없었을까. 양심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지킬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가지는 살아 있는 ‘물질’적 가치라는 점에서 장교들은 양심을 지키지 못했을 뿐이다.


쉰들러가 생명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명과 양심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기업인이자 나치 당원이라는 자신의 권한을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자본을 들여가며 목숨 걸고 죽음에 내몰린 생명을 구했다. 독일군 장교와 능란한 협상을 통해 수용소의 유태인들을 자신의 공장에 노동자로 고용함으로써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팔이 없는 사람은 강제 노역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생명에서 배제시켜 무참히 죽여 버린 것은 나치 장교였다.


쉰들러는 나치 당원에게 금지된 유태인에 대한 애정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유롭고 유연하게 사고하고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가진 권한을 활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독일군 장교들은 더 큰 특권을 가졌음에도 기계적이고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그들 스스로 양심을 지키거나 권한을 활용할 줄 아는 유연한 사고와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쉰들러가 자신이 가진 권한을 유연하게 잘 활용하여 인류를 구했다는 점에서 그가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을 떠나 이름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노동자를 위하는 정당에 뜻이 있다면 그와 함께하고 싶어 진다.



3


‘한 사람’을 구함으로써 인류를 구하는 길은 가까이에도 있다. 둘이서도 가능하다. 옆에 있는 짝꿍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누군가의 짝꿍이 되어주는 것이다. 친구든 동료든 연인이든 부부든 이웃이든 서로의 짝꿍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짝꿍은 어떤 사회에도 존재할 크고 작은 구조들의 크고 작은 폭력을 완화해 줄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줄 것이다.


“그냥 웃으며 걸어가요/ 넌 어떤 맘으로 또 어떤 생각에 잠겨 이 길을 건너요/ 니가 원한다면 흐린 날엔 비가 될래요/ 추적이는 여름 비가 되어/ 당신이 원하면 어떤 계절이라도/ 추적이는 여름 비가 되어/ 당신이 좋다면 어떤 모습이라도/ 그냥 웃으며 걸어 봐요.”(장범준, 추적이는 여름 비가 되어)


계절을 알 수 없는 기후와 침투 경로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괜스레 울적해지는 나날들. 서로가 서로의 짝꿍이 되어, 짝꿍과 함께, 그냥 웃으며 걸어 봐요. 지금 이 순간 짝꿍과 함께 웃으며 걷는 소중한 시간이, 짝꿍을 위해 여름 비가 되어주려는 소중한 마음이, 어느 계절이라도 짝꿍을 위해 어떤 모습이라도 되어주려는 마음이 인류를 구한다면, 한 사람의 짝꿍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둘이 되어 여름 비가 되어 당신이 되어 우리가 되어. 다시 만날 테니. 그냥 웃으며 걸어가요.


2021.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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