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책에서 읽은 내용 중에서 의미 있게 다가오는 문장들을 모아서 브런치에 ‘책속에서’라는 제목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모든 문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요, 긴가민가 하지만 한번 쯤 생각해보고 싶어서 올려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글을 읽은 작가님들이나 지인들 중에도 문장들에 공감하는 분들도 있고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 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을 믿고 실천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조증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개 사랑의 황홀감은 몇 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인생의 매 순간을 혁신하며 ‘나날이 새롭게’ 사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중단 없는 상호 발전을 통해 관계의 질이 진화하지 않는다면, 그 뒤 시간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권태와 제도를 통한 감정의 구속만이 남을 뿐이다.[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68~69]
‘책속에서(23)’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위 문장에서 ‘일부일처제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계셔서 제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살기 위해서 일정한 제도(법이나 관습)가 필요합니다. 그 제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거나 폐기되기도 합니다. 구성원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제도는 생겼다 사라졌다 합니다.
저는 ‘제도의 효과와 강제성 여부’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도가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면 좋다는 것이고,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억압한다면 문제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제도가 좋은 것인지, 억압적인 것인지는 사회 구성원들의 처지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결혼(일부일처제), 가부장제’라는 제도도 기존에 없던 것이 아주 오래전 사회의 필요(사유재산의 상속과 보호)에 의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한데, 여성들에게 억압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변화해 온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예전만큼 결혼이나 출산이 강제적이지 않다. 예전만큼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육아를 하지 않는다. 예전과 같은 시월드, 남아선호, 남성중심은 거의 없어졌다. 오히려 며느리 중심이다. 더 이상 이혼이 여성에게 불리하지 않다. 예전에는 남성들이 주로 혼외정사(성매매, 외도)를 했지만, 요즘은 여성들도 한다. ‘일부일처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부 다처제’라거나 ‘가족 이기주의’라는 문제는 일부 부유층이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그 이유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든, 사람들의 권리의식 신장 때문이든, 그 모두 때문이든 결혼(일부일처제)이나 가부장제가 낳았던 폐해들이 예전만큼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경험적 사실들을 일반화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중요한 것은 그 제도들의 ‘현재적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서 얘기했듯이 제도의 강제성 측면은 사라지고 있다고 할 수 있어 보입니다. 다만, 효과적인 측면, 즉 그 제도가 우리 삶을 이롭게 해주는가라는 점에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 제도들이 존속되어야 한다면 말입니다.
가부장들이 권위주의적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든든한 어른 역할을 해주고, 결혼이 두 사람의 삶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런 의미를 가지는 가부장제와 결혼(일부일처제)이라면 무슨 문제인가 싶습니다.
그와 같이 ‘평등해서 풍요로운’ 사회에서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죽을 때까지 화목하게 오순도순 살아갈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누구나 그런 삶을 바라며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일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회라면 개인들의 문제라기보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살아 남기 위해 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정치·경제적인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이 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와 같은 불평등과 차별이 기존의 ‘가부장제와 결혼제(일부일처제)’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기 보다 관계 자체를 해체 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자신들의 ‘자율’을 중요히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봅니다. 사회의 구조나 제도가 야기하는 불평등이나 차별을 부단히 없애 나가려는 사람들, 자신의 자율을 위해서 타인의 자율을 억압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2024.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