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는 자신의 변증법 강의가 ‘미완’으로 남았음을 의식하고 있다. 강의는 끝났지만 여전히 변증법 운동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변증법에 대한 강의 역시 다시 써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다.
관념론자가 아니라 변증론자라면 완성을 향해 부단히 운동해 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아도르노는 변증법이 “짜임관계, 전체, 연관관계 등을 다루면서 동시에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쓰고 있다.(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362쪽)
아도르노에게 ‘완성’은 ‘짜임관계’를 이루려는, ‘전체’에 다가가려는, ‘연관관계’를 파악하고 ‘모순’을 넘어서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완성을 향해 가는 운동이 변증법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정불변의 영원한 완성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다만, ‘미완성’의 ‘완성’상태를 이루며 또한 다시 ‘완성’을 향해 운동해 갈 뿐이라는 점에서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
아도르노는 “차이 나는 것들을 서로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유토피아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쓰고 있다.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만’ 이를 수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상’을 아도르노는 ‘짜임관계’라는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사고의 관계가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짜임관계라면 (…) 모든 사고는 중심과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 모든 개별 명제는 논증의 힘, 즉 반성적 사고의 힘으로 충만해 있으며, 또 한편 한 사태 자체를 포착하는 정확성의 힘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 모든 말, 모든 명제, 모든 구문적 틀이 다른 것과 똑같은 책임을 지기 때문에 어떤 전체의 구성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할 뿐 (…) 사유에 의해 충족될 수는 없지만, 이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361쪽)
‘위계적 관계가 아니라’, ‘중심과 같은 거리’, ‘반성적 사고의 힘, 정확성의 힘으로 충만해’, ‘다른 것과 똑같은 책임’,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
이와 같은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사유’와 ‘글쓰기’는 ‘짜임관계’(별자리)라는 비유를 통해 ‘유토피아적인 인간 관계’를 보여준다. 물론, 아도르노 자신의 말처럼 인간 세계에서 ‘짜임관계’는 ‘이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짜임관계’가 이룰 ‘유토피아’로서의 ‘완성’된 세계는 ‘미완성’의 형태로 부단히 가 닿아야 할 세계일 뿐이다. ‘미완성’의 ‘완성 상태’를 부단히 ‘지양’해 가는 운동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 운동은 ‘주체와 객체’, ‘의식과 대상’, ‘개인과 사회’, ‘부분과 전체’가 차이와 대립 속에서 관계하며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관계 속에는 모순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그와 같은 ‘유토피아’에 이르기 위해서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고 쓰고 있다. 아도르노가 바다를 건너기 위한 전략으로 제시하는 것이 ‘변증법 운동’인 것이다. 그 운동의 대표적인 전략이 ‘미시론적 사고’, ‘내재 비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4. 5. 18.
<사진들> 독일 베를린에서 영진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