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인류에게 이롭다
‘대상은 변한다.’ ‘고정적이지 않다.’ 이러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인해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사유는 동일하지 않다거나, 진리도 가변적이라거나, 더 나아가 애초에 대상에 대한 사유, 대상에 대한 앎, 대상에 적합한 사유로서의 진리는 불가능하다는 사유가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상을 알아가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인류에게 이롭다는 점에서, ‘과학’의 이름으로 대상을 알아가고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진화하는 인류에 고귀한 가치들을 부여하며, 또한, 이로움을 누리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l 더 촘촘한 사유를 멈출 수 없다
아도르노는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사유의 모델로 ‘미시론’과 ‘시간의 핵심’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미시론은 변화하는 대상을 끊임없이 따라잡으며 사유의 ‘결여와 오류’를 줄여나가는 사유를 말합니다. 대상과 사유를 대질하면서, 또한, 그 대상에 대한 사유와 사유를 대질하면서 말입니다.
아도르노는 미시론적으로 촘촘하게 사유하고 그 사유에 대해 철저하게 내재 비판을 하며 사유의 ‘결여와 오류’를 없애나간다 해도 늘 ‘빈틈과 공백’, ‘비동일자’의 영역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더 촘촘한 사유하기를 멈출 수 없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아도르노는 그와 같이 계단을 올라가듯 차곡차곡 사유를 쌓아가는 데카르트식의 사유를 ‘계단의 우상’이라고 비판하면서 사유가 때론 ‘날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사유가 대상과 무관하게 날아다니기만 해서도 안 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와 같이 대상이 모순의 운동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는 시기가 올 수 있고 그와 같은 운동을 사유가 따라잡으려면 날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도 사유가 대상을 따라잡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ㅣ진리는 타이밍이다
대상은 변하며 사유는 대상을 따라잡을 뿐이며 사유의 관점에 따라 대상에 대한 파악도 달라진다면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보편적인 진리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묻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과학적 사유를 통해 알아 낸 것들을 안다고 여기며, 그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진리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인류의 소멸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과학적 사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아도르노에게 사유는 역사적이며 ‘시간적 핵’(Zeitkern)입니다. ‘시간적 핵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타이밍(timing)이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사태가 바뀌더라도 그와 상관없이 이것은 여전히 타당하다.’ 이런 말씀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사랑은 타이밍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와 같은 ‘시간’, ‘때’와 연관된 표현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알맞은 시기’, ‘적절한 때’가 상대적인 ‘진리’를 보증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적절한 때’, ‘진리’의 순간을 ‘갑자기’, ‘불현듯’, ‘느닷없이’ 직관적으로 포착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유가 시간의 흐름, 역사를 따라잡고 있을 때, ‘진리’의 순간을 파악하기가 수월할 것이고, 동의할만한 보편의 정도도 커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24. 4. 27.
<사진들> 독일 베를린에서 영진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