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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Dec 02. 2023

인정과 욕망(4)

‘인정과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가족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소녀 같은 누나와 사고뭉치 남동생, 그의 20살 연상의 연인이자 시어머니 뻘 올케

끊임없이 사랑에 빠지는 엄마와 이런 엄마가 지겨워 가출한 딸

쪼잔할 정도로 소심한 남자와 헤플 정도로 정이 많은 여자     


김태용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2006)에 등장하는 ‘가족과 사랑’의 주인공들이다.

영화 개봉 당시, 영화사 측에서 실시했다던 ‘가족’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기억에 남은 내용은 ‘가족’에 대한 상반된 결과였다.      


가족은 ‘가장 소중한 것’이면서 ‘가장 내다 버리고 싶은 것'이라는 결과가 그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이어야 할 것 같은 '가족'이 가장 내다 버리고 싶어진 것은 애초에 '성별이나 위계'에 따른 억압이 없는 대등한 관계의 형태였던 가족이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을 이루는 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관계가 행복하기는커녕 되려 억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억압적인 이데올로기 요소들(가부장주의, 남성중심주의, 섹슈얼리티, 혈연주의 등)로 인해 야기된 '가족주의'는 야만이라며 가족 해체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해체될 가족이 구성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그것이 해체주의자들의 노력에 따른 것이든, 아니면, 자본주의의 '상품화', '파편화'의 원리에 따라 해체된 것이든, 해서, '가족과 사랑'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었든, 아니면,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에 갇혀있든, 중요해 보이는 것은 '관계'의 문제다.     


'가족이나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든, 아니면 또 다른 이름을 가지든, '자신을', 그리하여 '서로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관계'의 문제 말이다. 어떻게 관계할 때, 어떤 사회의 형태일 때, 서로 인정(사랑)을 주고받으며 관계 파괴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가족의 탄생>이 개봉한 지 17년이 지난 지금, ‘핵개인화’, ‘저출생’, ‘초고령화’, ‘100세 시대’, ‘비혼주의’, ‘1인 가구’, ‘동성부부’, ‘가녀장의 시대’(이슬아 작가) 등 이제는 제법 가족과 사랑의 모양이 다양해져서인지 당시에는 생소해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모았던 영화 속 ‘가족과 사랑’의 모습들이 아주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지만 여전히 생각나는 ‘사랑’도 있다.      


영화 속 세 번째 이야기, 경석(봉태규)과 채현(정유미)의 사랑이 그것이다. 

     


경석  넌! 넌, 날 좋아하는 게 아냐. 좋아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무심할 리가 없어.    

채현  잘못했어. 이번만 좀 너그럽게 봐주면 안 돼요?

경석  넌 아무한테나, 너무 친절해. 누가 지나가는 사람이고 누가 정말 중요한 사람인지. 

채현  사람은 누구나 중요하잖아. 지나가는 사람이든 아니든…  

경석  외로워. 나 니 옆에 있으면 너무 외로워. 그냥 혼자 있을래.  

채현  … 

경석  왜 전 남자친구가 널 떠났는지 알 거 같아.     


경석  돈만 꿔줬어?

채현  뭐?

경석  돈만 꿔줬냐고. 

채현  너… 진짜…     


경석  불안해. 

채현  뭐가. 

경석  네가 다른 사람들 하고 있는 거 싫어. 그게 늘 불안해… 

채현  …

경석  알아. 나도 내가 이상한 거. 

경석  너 외계인인 거 좋은데. 그래도 지구에 오면 지구 방식을 따라야 되잖아. 왜 그렇게…

채현  헤프냐고? 

경석  좋아. 근데… 넌,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왜 더 잘해? 

채현  ・・・지나가니까.    

경석  뭐? 

채현  사랑도 지나가는 거니까. 

채현  난… 이기적인 사람들이 무서워.  

경석  …

채현  그래, 내가 겁이 많아서 그래. 혼자 남는 거 무서워서.

        그래서 이리저리 헤픈 거야. 됐어? 

경석  채현아.

채현  무조건 따뜻한 사람이 좋아. 

        지나가는 사람이든 아니든, 나도 누구든지 힘들 때 그럴래.  

경석  채현아. 

경석  그럼… 차라리 날 놔줘.           



경석과 채현의 사랑이라고 했지만 이 글이 궁금한 것은 ‘채현’의 사랑이다.

채현은 경석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두 사람의 사랑에서 경석의 채현에 대한 반응이다.

경석에게 무심한 채현, 경석보다 남들에게 더 잘하는 채현, 채현 곁에 있어서 오히려 외롭다는 경석, 채현이 남들과 았는 게 불안하다는 경석, 해서, '차라리 날 놔 줘'라는 경석.     


경석이 주고받고 싶은 사랑은 자신에게 무심하지 않은, 남들보다 자신에게 더 잘하는, 곁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채현이 남들과 있어도 불안하지 않은 사랑이겠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채현, '경석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더 잘하는' 채현, '이기적인 사람이 무섭다는' 채현, '무조건 따듯한 사람이 좋다'는 채현, 해서 자신도 모두에게 그런 따듯한 사람이고 싶다는 채현.       


채현은 경석을 사랑하는 것일까. 채현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나만 바라봐주는 언제나 내 편'이면서 '모든 사람에게 따듯한' '사랑'의 관계,     


가능하지 않을까.          



2023.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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