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사유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싶었습니다
<관리되는 사회라는 ‘관념’>, <사유의 힘, 사유의 함정>이라는 글을 통해서 ‘사유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싶었습니다.
해서, ‘관리되는 사회’라는 아도르노의 규정을 ‘관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 규정이 실재와 상관없는 ‘관념’일 뿐이냐고 ‘되묻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그런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양측 모두에서 그렇습니다. 양측 모두를 비판하는 ‘관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양측 모두를 비판하고 있으니 양측 모두에게 비판받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ㅣ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관념’인가
실재에 대한 모든 개념 규정은 ‘관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관리되는 사회’, ‘전체주의’, ‘민주주의’, ‘자유’, ‘평등’, ‘사랑’ 등등은 사유가 규정한 ‘개념’들입니다. 그 개념들에 대한 ‘관념’들은 천차만별이며 고정적이지도 않습니다.
그 개념들에 대해 각자 다른 ‘관념’을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익과 권리’에 따른 것입니다. 맑스는 ‘이론이 대중을 사로잡을 때 현실적인 힘(무기)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이때에도 대중의 ‘이익과 권리’를 대변하는 이론이 대중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문제는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입니다.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넘어서기 위해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관념’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있는가, 그 힘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경제 위기(빈곤, 양극화, 실업)’, ‘기후 위기(환경 재앙, 식량 부족, 전염병)’, ‘전쟁(영토 및 자원 쟁탈)’의 근원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넘어설 힘 말입니다.
ㅣ현실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어 비판하는 것입니다
저는 맑스 관념의 산물인 <자본론>을 읽고 토론하는 행위가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노동자 조합, 노동자 정당, 노동자 단체들과 함께 노동자들이 <자본론>을 비롯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파악하는 행위가 즐거운 일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노동자들이 맑스의 ‘관념’에 사로잡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야기하는 문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할 때 ‘자본주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듯,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관념’ 없이, 그것도 제대로 된 ‘전략적 관념’ 없이 ‘자본주의’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정면 돌파를 꾀했다는 점, 즉 아주 간단히 말해서 세계의 화해는 그 객관적 모순 상태 위쪽에서의 조율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 모순상태 자체를 통과 하면서만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펼쳐봤다는 점입니다.”(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135쪽)
아도르노의 위 글을 통해 헤겔에게도 아도르노에게도 ‘모순을 정면 돌파’하려는 ‘관념’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도르노가 ‘정면 돌파’를 이끌어 내는 사유 방식 혹은 전략은 ‘촘촘한 미시론적 사유’와 ‘내재 비판’입니다. 현실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어 비판하는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설 때까지 말입니다.
ㅣ관념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아도르노의 ‘관리되는 사회’에 대한 내재 비판이 맑스의 <자본론>처럼 ‘자본의 운동 법칙’을 밝히고 그 한계를 드러내는 ‘관념’이었는가, 그런 비판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물음은 맑스에게도 적용됩니다. <자본론>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면 ‘자본주의’를 넘어서게 되는가.
저는 맑스의 관념이 노동자들을 사로잡기를 바랍니다. 또한, 아도르노의 관념이 노동자들을 사로잡기를 바랍니다. 그 두 사람 모두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데, 자본주의의 모순을 정면 돌파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맑스의 관념에서도 아도르노의 관념에서도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면 돌파하기 위해 취할 것이 있다면 취하겠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결국, 정면 돌파를 하는 것은 맑스의 관념도 아도르노의 관념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를 정면 돌파하여야 한다는 관념을 가진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정면돌파, 관리되는 사회, 이 모두는 ’관념‘입니다. 하지만, ’실재‘이기도 합니다. 그 관념들이 실재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용할지는 실재를 사유하며 그들 관념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024. 5. 14.
<사진들> 독일 베를린에서 영진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