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국가에 대항했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마르크스는 단지 ‘자본주의’만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와 동시에 국가를 극복하고 폐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주의)의 ‘국가 소멸’ 테제를 동시대의 프루동이나 바쿠닌과 같은 아나키즘 사상과 특별히 구별해야 할 필요는 없다(Basso 2015, 176) 마르크스의 사상은 국가 폐지를 주장했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아나키즘의 흐름에 위치할 수도 있다. 이렇듯 단순해 보이는 점을 강조하는 데에는 큰 의미가 있다.(스미다22)
[국가에 대항하는 마르크스]의 저자의 위 주장처럼, 필자도 ‘국가 소멸과 국가 폐지’를 특별히 구별해야 할 필요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저자의 주장처럼,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국가 극복’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목표가 동일하더라도 목표에 이르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와 국가를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것이겠다. 해서, 각자의 방식의 차이보다 유사성을 통해 함께 극복해 가려는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필자는 저자가 주장하는 ‘특별히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의 의미를 그렇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 자본주의와 국가의 극복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도 여러 논자들의 방식을 살피고 논의를 확장하는 것은 의미 있을 것이다.
맑스는 1864년([자본] 서문을 쓴 해이기도 하다)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리는)의 창립 발기문을 작성했고, 그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국가 극복’을 위한 주요한 방식은 ‘정치 권력의 전취는 노동자의 의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 등이다.
또한, 프루동의 협동조합 운동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협동조합식 노동이 개별 노동자들의 우연적인 노력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제한된다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나는 독점의 성장을 억제할 수 없으며” “근로 대중을 해방시키려면 협동조합 제도는 국민적 규모에서의 발전과 국민적 수단에 의한 추진을 필요로 합니다”
위 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맑스가 협동조합 제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국민적 규모’, ‘국민적 수단’과 같은 표현들이다. 한편, 맑스가 1872년에 쓴 「인터내셔널의 이른바 분열」이라는 글에서 ‘인터내셔널’의 ‘분열’의 주요 요인으로 바쿠닌에 대해서 쓰고 있기도 하다.
위의 사실들에서 ‘자본주의와 국가의 극복’을 위한 방식으로 맑스는 ‘자본주의’ 연구 및 [자본] 서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위한 ‘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참여를 통해 ‘정치 권력의 전취’, ‘제 민족의 결합’을 주창했다는 사실, 프루동은 ‘협동조합 운동’을 했다는 사실, 바쿠닌은 인터내셔널의 분열을 야기했지만, 인터내셔널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스미다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단지 경제적 영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비판한 것”이라는 점에서, 또한, 이 사회시스템에는 “상품이나 화폐, 자본에 의해 구성된 시장 시스템이라는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법이나 법률, 국가와 같은 권력관계도 포함된다”(스미다22-23)라는 점에서, 오늘날 ‘자본주의와 국가를 극복’하려는 논자들과의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홀로웨이에게 국가권력은 자본주의적 권력관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국가권력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20세기 ‘현존사회주의’와 복지국가의 실패가 보여준 것처럼, “권력을 잡지 않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Holloway 2002)는 것이다.(스미다35)
홀로웨이에게서 발견하는 맑스와의 유사성은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맑스는 ‘정치권력의 전취’를 ‘노동자의 의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홀로웨이와는 구별되기도 한다. 맑스의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권력을 노동자들이 전취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스템을 변혁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변혁의 과정을 통해 ‘국가 소멸’, 마침내 국가 폐지로 나아가려 했을 것이다.
‘권력을 잡지 않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홀로웨이의 방식은 프루동이나 바쿠닌의 방식과 유사해 보인다. 그들에게 국가 폐지의 의미는 어소시에이션(협동조합 등)이나 개인들의 자율성을 통해 국가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히르쉬의 ‘급진적 개량주의’는 국가를 포함한 권력관계 전체를 바꾸기 위해 ‘국가의 내부에서 그리고 동시에 국가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국가 제도를 개량하는 여러 실천을 의미한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러한 개량 투쟁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가 제시한 정치 중심주의적인 ‘계급투쟁’보다 더 급진적이다.(스미다36)
히르쉬가 주창하는 ‘급진적’으로 ‘제도를 개량하는 여러 실천’과 ‘계급투쟁’을,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와 자신을 특별히 구별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필자에게 그 양자는 별개의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굳이 구별해야 한다면 ‘제도 개량’의 내용일 것이다.
개량의 내용이 ‘자본주의와 국가 극복’을 위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자본의 이윤증식을 위한 무문별한 생산을, 노동자 착취와 자연 파괴를, 제국주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제도 개량인가가 관건일 것이다.
“변혁적인 사회 실천은 정치라는 형태, 즉 정치의 폐지를 위한 정치라는 형태를 취한다”(Demirović)(스미다37)
여기서 폐지해야 할 정치는 ‘의회정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측된다. 한데, 그 정치의 폐지를 위한 정치는 폐지해야 할 그 정치와 무관할 수 있는가. 국가 폐지와 마찬가지로 정치 ‘폐지’의 의미가 지양해 간다는 의미의 ‘소멸’과 특별히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폐지가 ‘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본주의 국가의 권력 메커니즘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치적 자기조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Hirsh 1990, 118ff)(스미다37-38)는 주장도 데미로비치의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의 정치가 폐지해야 할 정치나 국가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맑스가 참여했던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정치 권력의 전취’를 노동자의 의무라고 했을 때, 그 정치 권력이 의미하는 바가 프롤레타리아 개개인이 국가의 주권자가 된다는 의미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데미로비치나 히르쉬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미다는 “경제적 권력관계 및 정치적 권력관계를 전체적으로 변혁하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를 새롭게 발명해나가야 한다”(스미다38)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도 ‘소멸-폐지’, ‘경제-정치’, ‘부분-전체’, ‘제도 개량-계급 투쟁’, ‘국가-시민사회-코뮌’과 같은 이분법을 넘어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의 단결과 제민족의 결합을 위한 실천이 필요할 것이다.
그 방식이 어떠하든 ‘자본주의와 국가 극복’, 더 나아가 생태계 파괴와 전쟁으로 인한 인류 재앙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늦추기 위해서 그러한 실천이 필요할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2024. 8. 9.
*국가에 대항하는 마르크스, 스미다 소이치로 지음, 정성진ㆍ서성광 옮김, 산지니 2024.
<대문사진> 베를린. 영진 찍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