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든, 봉건제든, 자본제든 어느 생산양식에서든 생산력을 증대시키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생산력을 어떤 방식으로 증대시키는가일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인류사의 생산양식에서처럼 생산수단을 사유화 한 소수가 자연과 인간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방식으로만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러한 생산양식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수탈과 착취’를 통한 생산양식이었기에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필연적인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든 가설이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과 착취’라는 이유에서 다른 생산양식에 대해 의문을 가질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생산양식도 가능하지 않은가라고 말이다.
실제로 인류사에 ‘생산수단의 사유화 없는’, ‘수탈과 착취 없는’ 생산양식의 형태를 지닌 공동체들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역사가 존재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과 착취’에 기반한 ‘생산양식’보다는 ‘우애와 평등’에 기반한 생산양식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과 착취’에 의하지 않고도 생산력을 증대시켜 소수만이 아니라 공동체 모두가 함께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이,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에 의해 그러한 생산양식의 가능성은 생겨나는 것일 테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러한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러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힘의 논리에 따라 힘 센 소수가 자연과 인간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것이 인간이 포함된 자연의 법칙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한 생태계의 법칙이 전부가 아니라 생태계의 만물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물질대사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우애와 평등’에 기반한 생산양식을 바라며 지향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고 점점 더 늘어갈수록 그러한 생산양식의 확대 가능성이 커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러한 생산양식이 확대되기 위한 관건은 한 가지 사실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수탈과 착취 없이, 혹은 수탈과 착취를 최소화하면서도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이미 물음 속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물음과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온 것이, 찾아가는 것이 인류가 ‘우애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과학과 이성’의 도움으로 진보해 온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2024. 8.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