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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헛된 망상’

by 영진


‘극우 수괴 될 줄 몰랐다’*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글을 읽고 다시 ‘권력’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럴 만한’ ‘권력’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다고 해서 모두가 ‘극우 수괴’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는 여지는 있는 것이다. 그 권력이 크면 클수록 그 권력이 일으킬 일은 상식과 상상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존립 기반인 법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 역시 그럴 수 있는 ‘권력’에 취해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권력이 없는 이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는 있지만 법 위에 군림하려는 것은 아니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파시즘’을 ‘평범한 인간의 성격 구조가 조직화 되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설명한다. 라이히는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사회에서 ‘성격 무장’을 통해 ‘자유 능력’을 상실한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권위에 기댐으로써 파시즘과 같은 독재가 가능해진다고 설명한다.


가부장주의나 권위주의가 문제적인 것도 ‘권력’ 때문일 것이다. 파시즘의 극우 대중이 발생하는 것도 그들이 기댈, 그들을 기대게 하는 ‘권력’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권력’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위치에 주어지는 ‘권한’이나 ‘권위’를 넘어 권력이 되고, 무소불위의 ‘독재’가 되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영화 <디 벨레>(Die Welle, The wave, 독일, 2008)에서 감독은 고등학교 교사인 뱅어와 학생들을 통해서 묻는다. 아직도 독일에서 독재정치가 가능할까? 독일에서 더 이상 독재자가 안 나올까? 더 이상 독재는, 독재자는 없을 것이라는 학생들의 대답과 함께 뱅어의 '독재정치'는 시작된다.


뱅어는 학생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대표자(뱅어)를 뽑고, 대표자에 대한 존경을 표할 것과 규율과 통제에 따를 것을 요구하고 공동체의 이름을 '디 벨레'(물결)라 짓고, 흰색 상의로 복장을 통일하고, 로고와 홈페이지도 만들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학생들, 아니 '디 벨레'의 멤버들은 일주일 동안의 공동체 경험이 행복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뱅어는 여전히 행복감에 도취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디 벨레'가 끝났음을 알린다.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고 무엇보다 '독재정치'를 학생들 스스로가 구현했기 때문에 수업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다.


학생들의 행복 경험이 '디 벨레'의 멤버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공동체로부터 배척하려 했고, 그들을 배신자로 몰아 처벌하려 했고, '디 벨레'의 대표자인 뱅어가 시킨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디 벨레'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하고 자살하는 일까지 일어난 것이다.


학생들은 여전히 공동체 '디 벨레'를 지키려고 한다. '우리가 실수를 했지만 바로잡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뱅어는 그런 학생들의 생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런 건 바로 잡을 수 있는 게 아냐.'




여전히 ‘독재정치’는 가능하다는 뱅어의 입장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그런 건 바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입장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의 입장처럼 무정부주의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들을 끊임없이 바로 잡아가며 더 나은 방향으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인류는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 방향이 무정부의 상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류가 지향하는 더 나은 방향이 어떤 곳이든 그곳으로 가는 길 역시 ‘지금, 여기’의 ‘독재정치’를 넘어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독재정치는 자기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다. 자기 선택에 달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민주적이고 평등하려는 ‘권위’와 ‘권한’을 선택하여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와 공동체를 이루며 지켜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권위가 권위주의가, 권한이 권력이, 권력이 독재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대중들이 ‘자발적’이 되는 것은 ‘권력’에 의해서다. ‘권력’에 억압받던 대중들이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억압할 수 있는 권력이 되고 싶은 심리가 ‘자발적’으로 파시즘에 동조하게 하는 것이다.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주목하는 파시즘의 심리가 가부장주의와 권위주의에 억눌려 권력에 복종하거나 권력과 동일시하는 대중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파시즘의 세계에서 주목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대중보다 권력 주변에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인과 정부 관료’일 것이다.


대중들이 ‘헌법’이라는 권위에 기대 헌법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극우 수괴’를 처벌하려는 자발적인 행위 앞에서 ‘정치인과 정부 관료’들이 ‘극우 수괴’를 자발적으로 방어하려는 것은 ‘극우 수괴’를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언젠가 자신들이 그 '권력'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심리, 아니, ‘헛된 망상’ 때문일 것이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한과 권위를 누리는 것은 자신들을 살아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을 오래도록 살게 할 것이다.



2025. 1. 8.



*윤석열과 58년 우정 이철우 교수 “극우 수괴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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