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나는 히틀러가 만든 절멸 작동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며 학살 책임을 부인했다. “나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 맡겨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강변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미국에 망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 대량학살자 아이히만이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을 변론하는 것에 충격을 받고 그 이유를 곱씹었다. 이른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이 그렇게 탄생했다. 악마적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명령만 따를 경우 누구라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논리다.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슈탕네트가 쓴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2011)은 아렌트가 꼭 50년 전 주장했던 ‘악의 평범성’ 논리를 정면 반박하고 ‘대량 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책의 부제)을 드러내 아이히만의 악행과 간교함을 폭로한 책이다.
슈탕네트는 “아렌트의 책이 처음 출간됐을 때 많은 독일인은 ‘악의 평범성’이란 용어가 책임을 은폐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다”며 “아렌트가 너무 성급하고 무엇보다 위험”했다고 지적한다. 실제 아렌트는 문제적 저서에 “아이히만의 행동은 정신 나간 유대인 혐오 사례가 분명히 아니며, 광신적 반유대주의 또는 세뇌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며 “적어도 그를 진단하고 난 뒤의 (혼란에 빠진) 나보다도 더 정상적이었다”고 썼다.
슈탕네트는 곳곳에 흩어진 그 많은 기록을 샅샅이 검토해 악의 평범함 뒤에 숨은 반인륜적 범죄자의 민낯을 드러내 보인다. 끈질긴 탐사 저널리즘, 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학술 논증, 흥미롭고 유려한 글쓰기가 어우러진 성과다.
-한겨레 신문, 2025. 2. 28. 기사 중에서*
악마적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명령만 따를 경우 누구라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이란 용어가 ‘책임을 은폐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 때문에 논란이 되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나의 경우, 아렌트의 용어를 ‘누구라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경각심’ 정도로 받아들인다. 그처럼 악이 평범하다고 해서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주장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누구도 범죄에 대한 책임을 은폐할 수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책임을 은폐할 수 있는 사회라면 누구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악이 평범해지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교육’이 필요할 것이며,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공정하게 죄를 묻고 시행할 수 있는 ‘법제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 ‘교육’, 그런 ‘법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사회라면 악이 평범해질 수도 있고,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회라면 범죄가 만연할 것이며 죄에 대해서도 무책임, 무감해질 것이다.
한데, 누구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악이 평범하다고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침략과 약탈 전쟁이나 민간인 학살을 비롯한 대부분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그런 범죄에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책임을 은폐하고 회피하려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권력자들’ 아니었나 묻게 된다.
그런 점에서도, 악이 평범해 보이지도 않고, 악에도 ‘질’이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악질적인 ‘권력형 범죄’ 앞에서 웬만한 악은 악처럼 보이지도 않는, 그저 평범한 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날 나에게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는 ‘누구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의미보다, 이제 웬만한 악은 악도 아닌 것으로, 아렌트가 ‘평범성’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영어 단어 ‘Banality’에 담긴 ‘평범함’이란 의미 외의 또 다른 의미인 ‘시시함’이란 의미로, ‘악의 시시함'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025.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