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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Jul 23. 2023

승부를 즐겨라!?

영화 [보리 VS맥켄로] 읽기 

각본 없는 드라마. 스포츠는 살아있다. 스포츠의 세계를 그렇게 부른다. 승부가 있는 곳이라면 그렇지 않을까. 사람들은 살면서 가끔 드라마를 쓴다. 살아 있기에 각본대로 안 되는 바람에 쓰게 되는 드라마를 말이다. 스포츠라면 모를까 사는 것 자체가 죽음과의 지난한 투쟁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승부라는 표현은 말랑말랑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누군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겠냐마는 살아 보겠다면 살면서 뭐라도 이뤄 보겠다면 피 말리는 승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피할 수도 초월할 수도 즐길 수만도 없어 보이는 냉혹한 승부의 스포츠의 세계는 우리의 삶이기도 한 것이다. 승부에 관한 흔한 이야기들 속에서 나의 오랜 관심은 ‘승부를 즐겨라’는 말의 의미다.


테니스 세계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보리 VS맥켄로(Borg/McEnroe)>를 보면서, 윔블던 대회 5연패를 노리던 비외른 보리와 그의 아성에 도전하던 신예 존 매켄로의 승부를 보면서 ‘승부’에 대해 다시 물었다. 그들에게 ‘승부’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승부를 즐겼을까. 즐긴다는 것은 무엇일까.


코트에서 판정에 대해 강한 불만을 터트리며 매 경기 말썽을 일으키는 악동 이미지의 매켄로,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고도 고독하게 승부를 대하는 구도자 이미지의 보리. 두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나 상반된 것이어서 그 자체로도 흥밋거리였다. 그 이미지는 그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승부에 대한 그들의 강한 애착에서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승리하고 싶은 것이고 이기려고 애쓰다 보니 자연스레 형성된 모습일 것이다.


아버지의 곱셈 문제를 푸는 일은 어린 매켄로에게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풀었을 때의 성취감, 아버지와 아버지 지인들로부터의 인정은 명석한 아들을 둔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기에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부담감 또한 컸을 것이다. 불같이 폭발하는 그의 감정은 승리해서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한 인정욕구에서 생겼을 것이다. 


보리는 어릴 적부터 자기 자신과 싸웠다. 상대와의 승부에 대한 승리는 자신을 이긴 것에 대한 대가일 뿐이다. 병적으로 보일만큼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보리는 그 누구의 인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인정, 즉 자기만족을 위해 승부한다고 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코치도 해고할 만큼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승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로 인해 승리하거나 패배할 뿐 자신의 승부에 누군가 개입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테니스 역사상 세기의 대결로 화제를 모은, 마치 누군가 설정한 것처럼 상반되는 이미지의 두 사람의 승부에서 승자는 누구였을까. 경기 결과만 놓고 본다면, 첫 번째 승부에서 보리가 5연패를 달성했고 두 번째 승부에서 맥켄로가 보리의 6연패를 저지했으니 1:1 무승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보리는 은퇴했으니 더 이상 그들의 승부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은 승부를 즐겼을까. 두 사람의 승부는 준비 과정에서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마치 목숨을 건 사투와 같았다. 어디에서 즐거움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치열했다. 다만, 즐긴다는 것이 승패를 떠나 승패로부터 자유롭거나 초연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승패를 떠나거나 말거나 승부의 과정에 치열하게 몰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런 의미에서라면 두 사람은 승부를 즐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 중 누구도 패하지 않은 모두가 승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승리의 기쁨이나 패배의 굴욕에 지배당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그들은 즐긴 것이다.


2018.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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