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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Aug 26. 2023

유토피아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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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몰락의 필연성을 서술하는 것’, ‘계속 은폐되어 있었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내적 성격을 벌거벗기는 것.’ 엥겔스가 쓰고 있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가 발전해 가는 과정이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역사 파악,’ ‘잉여 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의 폭로’를 통해서 사회주의가 과학으로 발전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쓰고 있다.     


엥겔스는 세 사람의 위대한 유토피아주의자들을 통해서 유토피아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분한다. “프롤레타리아적 경향과 함께 일정 정도 부르주아적 경향도 지니고 있었던” 생-시몽과 푸리에,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장 발전한 나라에서 살면서 이 자본주의적 생산이 산출한 대립들에 영향을 받아 계급 차이를 철폐하기 위한 자신의 제안들의 모범을 직접적으로 프랑스 유물론에서 찾아 체계적으로 전개한” 오언이 그들이다. 엥겔스는 그들 세 사람을 ‘이성과 정의’의 왕국을 인식할만한 천재적인 인물들이라고 쓰고 있다.     


그럼에도, 엥겔스가 그들을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엥겔스가 주장하는 그들의 또 다른 공통점에 있다. 엥겔스에 따르면 이 세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점은, “그들이 역사적으로 산출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의 대표자로서 행동하지 않았다”(과학 435)는 점, 또한, 그들은 “특정 계급을 우선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즉시 인류 전체를 해방시키려 했다”(과학 435)는 점에서 유토피아주의자라는 것이다.          



2     


엥겔스의 주장에서처럼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속임수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또한, ‘인류 전체’를 해방하겠다는 것이 최종 목적지일 수는 있겠으나 그곳으로 가는 방법으로는 ‘특정 계급’을 우선 해방시키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며 목적지에 이를 가능성도 클 것이다.      


그리고, ‘특정 계급’ 내에서도 ‘자본가계급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이익의 대표자로 행동하는’ 자들, ‘인류 전체’ 이전에 ‘특정 계급’을 우선 해방시키려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로부터 ‘계급 해방’을 이루어가는 것이 효과적이고 가능성이 높은 방법일 것이다.     


‘생산방식’이라는 토대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와 같은 생산방식에 대한 인식이 생산방식의 변화와 발전과 전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생산방식에 대해 천재적으로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전환을 이끌어 내지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발전법칙과 내적 속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노동자계급과 인류 공동체를 파괴하는 구체적 현실에 대한 개입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며, 자기 욕망의 성격에 대한 성찰과 계급투쟁을 통해 다른 생산방식의 공동체로 변화해 가야 할 것이다.          



3     


엥겔스가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쓰고 있듯이, 실제로 이제까지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다른 생산방식의 출현을 알리는 ‘몰락’은 ‘계급투쟁’과 함께 한다. 계급투쟁이 없다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몰락은 필연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옥이 계속되거나 인류의 파멸을 맞게 될 뿐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발전시켜 온 인류를 지속시킬 다른 생산방식의 출현은 요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급투쟁’은 필연적인가. 이 또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그래왔다는 것, 곧 역사가 될 ‘지금 이 순간’, ‘현재’에도 계급투쟁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계급투쟁’이 계속되는 한 계급투쟁은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연적인 계급투쟁과 함께, 의식적인 계급투쟁을 통해서 ‘역사’는 지옥을 확대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다른 생산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산력이 아니라 계급투쟁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력이 발전한다고 해서,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다고 해서 인류가 발전한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물질적 풍요를 평등하게 누리거나, 마침내 계급이 사라진 사회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발전과 진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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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생산력의 증대가 양면성을 지닌다는 점에서도 계급투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생산력의 증대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지만 그 과정이 한정된 자원의 무분별한 파괴와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살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그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물질적 풍요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발전이며 풍요인지 자괴감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 인류가 지속되어 풍요롭고 평등한 세상을 이루려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다른 생산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발전법칙을 따라가며 내적 속성을 드러내는 과학적인 계급투쟁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생산방식의 변화에는 ‘이윤율 저하’와 같은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내적 속성도 작용할 것이다. 또한, 그 변화를 위해서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떠받치고 있는 자본독재국가를 넘어 ‘노동자국가’로 그 성격을 바꾸어 가는 계급투쟁도 필수일 것이다.



5     


국가를 비롯한 크고 작은 조직들에서 구성원들 간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부단히 평등해지려 애쓰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노력은 조직의 성격을 바꾸어 나가는 일일 것이며, 조직의 구성원들 각자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가는 일일 것이다.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존중과 자기 욕망의 성격에 대해 성찰을 해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는 구성원들 간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기에 구성원 개개인 모두의 권리가 ‘평등’하게 보장되기가 대단히 어려운 조직이다. 그런데, 국가의 주인이 구성원 개개인들이라면 개개인들이 국가의 성격을 개개인들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해 주는 조직으로 변모시켜 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성원 개개인이 국가권력의 폭력을 경계해야 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경계해야 할 것은 개개인들이 행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일 것이다. 자칫 개개인들이 스스로를 해방하려는 노력이 각자도생을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지옥을 자초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오징어 게임’의 배후가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속성인 ‘자본가계급’의 이윤, ‘자본독재국가권력’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때 개개인들의 자기 해방의 노력은 더 평등한 사회로 가는 서로의 다리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들이 스스로 해방되어 국가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홀로, 함께’하는, ‘거리 두면서 가까이’ 하는, ‘연대와 단결’을 위한 관계 맺음의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과 같은 유토피아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도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다른 생산방식으로 전환하려는 계급투쟁과 함께 개개인들이 관계 맺음의 지혜를 ‘지금, 여기’에서부터 실천해 가야 할 것이다.          



6

     

오직 이윤 증식을 위해 사회 구성원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를 착취하고 살해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관계는 적대적인 모순관계일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 협력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길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계급 없는’ 생산방식으로 전환시켜 가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상호부조하며 협력하는 관계를 일구어 가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다른 생산방식으로 전환하는 과학적이지 못한 유토피아적인 방법일 수는 있겠으나 노동자들 간의 그와 같은 상호부조의 관계 맺음을 거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발전법칙에 따라 살아가면서 계급투쟁을 통해서 그와 다른 ‘생산방식’으로 변화시켜 가고 있다는 역사적인 필연을 서술하는 것이 과학적이라면, 유토피아주의적으로 개개인들이 ‘풍요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은 의미 있는 역사의 우연일 것이다. 유토피아와 과학이라는 두 대립 항이 상호침투와 보완을 통해 필연과 우연의 역사를 넘어선 역사를 써 나갈 수 있기를 지향한다.          



“   ” 인용은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5>, 박종철출판사 편집부 엮음, 김세균 감수, 박종철출판사 1997.          



2023.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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